업계 "신고조정 또는 '이중장부' 허용해 달라"
재정부, 사실상 신고조정 불허 방침
지금까지 '정률법'으로 유형자산 감가상각 회계처리를 해왔던 상장회사들이 내년부터 국제회계기준(IFRS)을 의무적으로 적용하면 1개 회사에 많게는 4조원에 가까운 법인세 추가부담이 발생한다는 사실이 시뮬레이션 결과로 나타나 '초비상' 상태에 빠졌다.
정률법 적용회사와 경제단체들은 "국민의 세금부담은 국회가 정한 세법에 따라 늘려야 하는데, 국제회계기준을 적용한다고 해서 세금부담이 커져서는 안된다"며 "특히 투자가 많을수록 세금부담이 커지는 것은 투자장려정책에도 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들은 "정부가 IFRS 적용으로 급격히 세금부담이 커지지 않도록 감가상각비의 신고조정을 허용해주거나, 그 역시 여의치 않다면 기꺼이 이중장부를 작성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을 테니 그것이라도 허용해달라"며 정부당국에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세제당국은 "신고조정을 허용할 경우 세수감소 규모가 큰 것으로 분석돼 신고조정 허용은 사실상 어렵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어, 정률법 적용회사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IFRS를 적용하면 왜 투자규모가 커질수록 세금부담이 커지는지, 또 정률법으로 감가상각을 해왔던 회사들은 어떤 요구를 하고 있는지 아울러 세제당국인 기획재정부는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를 자세히 취재해봤다.
■ 경제단체 "투자 많이 할수록 큰 부담은 문제"
경제단체에 따르면 정률법 적용기업들의 딜레마는 더 있다. 정률법을 써왔던 기업들이 정액법을 쓰게 되면 투자를 많이 할수록 세금부담이 더 커지게 되고, 심지어 투자를 포기하면 앞서 받은 불이익이 깔끔하게 해소돼 오히려 세금혜택을 입게된다는 것.
투자규모가 커질수록 감가상각비 규모도 커져 결국 투자 초기 정률법에서 정액법으로 바꾸는 효과가 커지고, 이에 따라 상각비 차이에 세율을 곱한 만큼의 급격한 납부세액 증가로 이어진다는 설명이다.
나아가 기업들이 투자를 포기했을 때 앞서 많은 감가상각이 이뤄진 정률법보다 정액법을 썼을 때의 장부가액(투자금액-감가상각비합계)이 크기 때문에 투자를 포기할수록 앞서 받은 불이익들을 해소할 수 있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
이에 따라 관련업체들은 "감가상각방법을 정액법으로 변경할 경우 내용연수에 해당하는 기간까지 급격한 세부담 증가가 발생하며, 이는 투자를 중단하지 않는 한 회복되지 않는다"며 "이는 기업투자를 늘려야 한다는 정부입장과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 관련업체 "신고조정 안되면 이중장부라도 허용해 달라"
대한상의를 비롯한 경제단체와 정률법을 써왔던 회사들에 따르면 정액법으로 상각방법을 바꿀 경우 매년 투자를 계획한 어떤 회사는 영구적으로 떠안아야 할 세부담증가가 3조8000억원에 이른다.
투자규모가 크고 또 수십년에 이르는 내용연수를 가진 장기투자일수록 세금부담 규모가 커지는 것으로 시뮬레이션 분석결과가 나왔다는 것.
특히 과거 뿌리가 공기업이었던 곳의 부담규모가 크게 됐다는 것도 눈에 띄는 특징. 이들 회사들은 과거 보다 쉬운 감가상각방법인 정액법을 써오다 감사원의 지적으로 정률법으로 상각방법을 바꾼 경우가 많아 더 억울해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들은 "국회가 만든 세법이 아닌 외국의 영향에 따른 회계기준의 변경으로 세금부담이 커지는 것은 문제 아니냐"며 "세금을 줄여달라는 것도 아니고 세법이 허용한 범위 안에서 기존에 내던 만큼만 세금을 내도록 해달라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감가상각 방법과 관련된 세부담문제가 해결되려면 세법이 결산조정을 신고조정으로 허용해주면 모든 우려가 다 해소된다는 것이 이들 업체들의 간절한 바램이다.
이들은 특히 "회사가 공시 재무제표 회계처리는 IFRS로 하더라도 세금을 내기 위한 장부는 기존 회계기준(K-GAAP)을 적용하는 이중장부라도 허용해달라"며 "이는 기업이 스스로 선택한 만큼 납세협력비용이 증가할 것이라고 정부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다.
K-GAAP 적용으로 인한 장부유지는 강제사안이 아니어서 납세협력비용은 해당기업이 스스로 선택한 일이고, 이에 대한 외부감사인의 검사를 받도록 한다면 신뢰성이나 검증가능성 문제 또한 피해갈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이미 IFRS를 도입한 국가 중에 독일, 호주, 핀란드, 덴마크, 체코, 슬로바키아 등 여러 나라가 이중장부 유지체제를 취하고 있고, 아직 IFRS를 도입하지 않은 미국도 이중장부를 허용하고 있다고 이들은 주장했다.
또 "IFRS를 의무 적용해야 하는 상장회사와는 달리 비상장대법인의 경우는 종전과 마찬가지로 정률법을 쓸 수 있는 것도 문제"라며 "그러면 똑같은 경제현상에 대해 세부담이 달라지는 공평성의 원칙에도 어긋난다"고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 세제당국 "신고조정 사실상 불허방침, 세부담 늘지 않도록 할 것"
경제단체와 정률법 적용회사들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세제개편 주무부서인 기획재정부도 상당한 공감을 하면서, 커다란 원칙 아래 몇 가지 세부대안을 정한 뒤 어느 방법으로 최종적인 세법개정을 할 것인지 저울질하고 있는 분위기다.
기획재정부 주영섭 세제실장은 지난 28일 한국세무학회 주최 심포지엄에 참석, "내년 국제회계기준(IFRS)이 상장기업 및 일부금융기관에 의무적으로 도입되더라도 법인세 부담과 납세협력비용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개정할 필요가 있다"는 원칙론을 제시했다.
그는 특히 "상장기업이든 비상장기업이든 똑같은 행위에 대해 세금부담이 같도록 개정할 방침"이라며 "세금 부담 등에 별 영향이 없을 경우 최대한 세법에 기업회계를 반영하겠다"고 강조했다. 여기까지는 어디까지나 원칙론적인 설명.
이에 앞서 재정부 고위관계자는 조세일보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정률법을 써왔던 기업들의 신고조정을 허용해 달라는 요청과 관련 "신고조정 허용은 사실상 힘들다. 정부가 앞으로 써야 할 돈이 많이 필요한데, 허용하면 큰 세수감소가 우려된다"고 밝혔다.
신고조정이 허용되면 지금까지 회계담당자의 실수 또는 회사이익을 크게 보이려하거나 배당정책 등으로 세법의 비용한도까지 감가상각비 회계처리를 하지 않았던 중소기업들이 신고조정을 하게되면 연간 2조원 안팎의 세수감소로 이어질 것이라는 분석 때문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어느 기업이든 IFRS를 도입한다고 해서 세금부담이 크게 늘어나서도 안될 것"이라며 "세수도 줄어들지 않고 또 특정기업의 세부담이 가급적 늘어나지 않게 한다는 큰 원칙 속에 3~4개의 대안을 마련, 어느 것이 좋을지 저울질을 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