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감세 철회'를 둘러싼 한나라당 내홍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안상수 한나라당대표가 법인세는 예정대로 감세하되, 소득세 감세는 사실상 철회하겠다는 입장을 밝힘에 따라 당내의 감세철회 목소리는 더욱 힘을 얻게 됐다.
박근혜 전 대표 역시 '소득세 감세철회, 법인세는 예정대로 감세 추진'이란 입장을 밝히면서 감세철회 논란에 가세했다.
그러나 청와대를 비롯해 일부 친이(親李)계 의원들은 여전히 감세철회에 부정적이어서 당내 논란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감세와 규제완화는 이명박 정부 경제정책의 두 축(軸)이며, 특히 감세는 정부가 시장에 보내는 일종의 신호이기 때문에 감세철회는 정책기조에 반(反)한다는 입장이다.
게다가 MB정부의 감세는 결코 '부자감세'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최고세율구간을 제외한 일반서민들에 대해서는 이미 감세를 실시했고, 8800만원 초과구간에 대해서만 시행을 2013년으로 미루어놓았을 뿐인데 '부자감세'라는 야당의 정치공세에 여당의원들이 줏대 없이 말려들고 있다고 불만이다. 22일로 예정된 한나라당 정책의원총회가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MB정부는 그동안 법인세와 소득세 세율 인하와 종합부동산세 완화 등 감세정책을 펴왔다.
소득세의 경우 중산·서민층에 대해서는 2009년과 2010년 2년에 걸쳐 1%포인트씩 2%포인트를 인하했지만 그 위 고소득층에 대해서는 부자감세논란 때문에 2013년 이후 미루어놓고 있다.
법인세도 2억 원 이하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이미 올해 목표대로 3%포인트를 인하했지만 2억 원 이상 기업에는 절반만 해주고 나머지 절반인 2%포인트는 2012년 인하가 예정돼 있다.
'부자감세' 논란은 야당이 부자감세를 철회해서 서민복지나 재정건전성을 높이는 데 쓰자고 나온 데서 촉발됐다. 여기에 한나라당 일부 의원들이 부자감세를 아직 하지도 않았는데 공연한 오해를 살 이유가 없다며 부자에 대한 세율인하 유예 분을 미리 철회해서 서민복지나 재정건전성을 높이는 데 쓰자고 맞장구침으로써 불이 붙게 된 것이다.
한나라당 정두언의원은 소득세와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를 철회하면 2010-2014년 5개년 중기재정운용계획상 7.4조원의 재정여유분이 생기며 이를 앞당겨 쓰면 2011년과 2012년 매년 2-3조원의 추가재정여력이 생긴다고 주장한다.
최근 복지수요증가에 따른 재정지출확대로 재정적자가 계속 늘고 있는 상황에서 세금을 올리기는커녕 줄이는 정책은 전형적인 포퓰리즘이라는 것이다.
당초 감세가 경기회복촉진을 위해 추진됐던 만큼 경제가 회복국면에 들어서면서 감세의 필요성도 그만큼 사라졌고, 게다가 한나라당이 중간층을 확보하며 중도우파정당으로 확실히 자리매김받기 위해서는 상징적으로 감세철회 정책이 필요하다는 주장들이다.
'부자감세 철회'의 정치에 맞서 '감세의 경제학' 도전도 만만치 않다.
'감세를 통한 경제 살리기'는 이념의 문제가 아닌 경제학의 문제라고 경제학자들은 주장하지만 '대기업과 가진 자를 위한 감세'라는 반발을 항상 불러온다는 데 문제가 있다.
감세를 하면 소비와 투자가 촉진돼 경제가 성장하고 궁극적으로 세수가 확대된다고 하지만 이는 통계상으로 검증된 이론이 아니다.
미국 레이건행정부의 감세정책도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감세는 지출확대와는 달리 그 효과가 늦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레이건의 감세정책 효과는 그 후 클린턴정부에서 장기호황으로 나타났다는 반박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는 소수의 주장일 뿐 일정부분 소득 재분배 효과가 있는 조세정책을 약화시켜 불균등만 심화시켰다는 비판이 더 많다.
세수가 늘기는커녕 줄어들어 당시 많은 전문가들은 검증되지 않은 래퍼의 이론을 섣불리 적용했다고 비난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이 연결고리는 더욱 약하다.
소득세의 경우 소득상위 10%가 내는 세금이 전체의 78%에 이른다. 이들은 세금을 감면받아도 그 돈을 소비에 쓰는 비중이 50%도 안 된다. 소득 하위 20%계층은 소득의 97.5%를 소비에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감세효과의 80%는 법인세 몫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법인세 감세혜택은 전체법인의 10%에 불과한 과표 2억원 이상 법인에 96.4%가 쏠린다.
감세혜택의 80%는 전체 1%도 안 되는 소수대기업에 집중되고 이들 기업은 자금여력이 넘쳐나 세금을 내려도 투자에는 별 영향이 없다.
법인세에는 늘 '이중과세'라는 비판이 따라 붙는다. 회사이익에 대해 법인세를 내고, 주주들이 배당수익을 받을 때 소득세를 다시 낸다. 이를 감안해 많은 나라들은 기업부담을 완화해주는 방향으로 세제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 과표가 1억 원이 넘으면 법인세는 25%의 최고세율이 적용되지만 실효세율은 이에 훨씬 못 미친다. 기업들이 임시투자세액공제를 비롯한 각종 공제혜택을 이미 많이 받고 있기 때문이다. 임시투자세액공제 폐지 법안이 현재 국회에 상정돼있는 것은 법인세 인하를 전제로 한 것이다.
법인세율을 5%포인트 내리면 세수 감소분은 9조원에 이르지만 경제성장률은 약 0.6%포인트 높아진다고 우리 당국은 추정한다.
그러나 고소득층에 집중된 세금인하는 자칫 해외소비나 자산투자를 늘어나게 할 뿐 내수소비 진작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하면서 소득격차만 키울 위험성도 다분하다.
사실 조세는 그 자체로 경기조절기능을 갖는다. 경기가 좋아 일시적으로 소득이 많아질 때는 높은 누진세율로 많은 세금을 걷어 경기를 안정시킨다. 반대로 경기가 나빠 일시적으로 소득이 적어질 때는 낮은 세율이 적용돼 경기 하강 폭을 줄일 수 있다.
이 자동조정기능을 인위적으로 왜곡시키는 것이 감세다. 재정의 건전성을 유지하면서 경제활성화를 극대화할 수 있는 적정 감세수준을 찾아내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제프리 삭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지난주 서울대에서 열린 특별강연에서 "부자감세로 경제가 성장하고 재정적자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는 동화에서나 나오는 얘기"라며 "미 국민들은 지난 30년간 세금납부에 관한 사회적 윤리를 잃었다"고 개탄했다.
미국의 정치가 월스트리트와 대기업 등 특정집단에 포섭돼 소득세감면과 사회보장 축소 금융규제완화 같은 잘못된 정책을 남발해 소득격차를 극심하게 벌려놓았다는 지적이다.
우리의 '감세를 통한 성장'이 자칫 30년 전 미국의 실패를 되풀이할 수도 있다는 경고로도 받아들여진다.
[약력] : 동아일보 경제부기자,워싱턴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주재 부국장, 경제담당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