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정세가 연초부터 요동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북한의 추가도발에 선을 그으면서 남북 간 대화를 압박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북한으로부터 포탄 대신 '무조건적인 남북대화 재개' 등 평화공세가 쏟아지고, 마침내 한국이 남북 고위급 군사회담을 위한 예비회담 개최 제의로 화답하게 됐다. 대화의 주도권을 둘러싼 기(氣)싸움과 함께 미·중과 남·북, 미·북, 일·북 간에 물밑 외교게임이 치열해지고 있다.
동북아 역내질서의 양대 축(軸)인 미국과 중국은 지난주 워싱턴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에 관한 큰 틀의 전략적 합의를 이루어냈다.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UEP)에 대해 공식적인 우려를 표명하면서 남한에 대화를 압박하는 이른바 '한반도 딜(deal)'이다.
공동성명의 핵심인 선(先)남북대화, 후(後)6자회담 재개 기조는 미·중 양국이 북핵문제에 대해 대화와 협상의 프로세스로 돌아가겠다는 방향선회를 공식화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남북이 진정성 있고 건설적인 대화로 6자회담 재개를 위한 분위기를 만들고 길을 닦아달라는 주문을 담고 있다.
한반도문제에 관한 언급이 공동성명의 7분의 1 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남북대화와 한반도비핵화는 G2(주요2개국)의 중심현안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북한이 추가도발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별도로 밝히면서 "후진타오 주석에게 한반도 긴장완화에 관한 중국의 역할에 대해 감사하다는 뜻을 전했다"고 했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발 이후 재도발 억제에서 중국의 역할이 있었음을 내비치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한반도문제에 대한 미·중 간의 입장 차이는 여기저기서 감지된다.
중국은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우려를 표명할 뿐 '사실 확인이 먼저'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공동성명에서 '북한이 주장하는(the DPRK's claimed) UEP'라는 표현을 쓴 것도 이 때문으로 관측된다. 우리정부는 북한 UEP 문제를 유엔 안보리(安保理)로 가져가겠다는 입장이지만 이 문제가 안보리차원의 대응으로 이어질 지는 미지수다.
남북대화 재개에 관해서도 중국은 대화재개 자체가 6자회담의 사전 정지작업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는 데 반해 우리정부는 천안함 폭침 및 연평도 포격도발에 대한 책임 있는 조치와 비핵화 대한 진정성 확인을 대화의 3대 조건으로 내걸고 있다. 공동성명에 '진지하고 건설적인 남북대화'의 문구를 넣은 것은 미국이 우리 측 입장에 보조를 맞춘 결과로 보인다.
미·중 양국은 G2 협력시대를 열면서 주요 쟁점현안들에 대해 공통점을 추구하되 차이점은 남겨두는 '구동존이'(求同存異)로 임했다. 두 나라 관계는 필수적이면서도 복잡한 관계지만 서로 간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함께 고심하고 공통점을 찾아 확대해 나간다는 공동성명의 다짐이 이를 뒷받침한다.
한반도 문제 협의의 경우 겉으로 드러난 공동성명이나 기자회견 언급보다 이면에 숨겨진 '진짜 얘기'들이 더 궁금할 수 밖에 없다. 미국과 중국은 각기 고위급인사를 한국과 북한에 보내 정상회담 결과를 설명할 예정이고 이 과정에서 남과 북에 대한 주문의 수위도 가름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서 분명한 것은 이 지역에 대한 거시적인 로드맵에 G2가 합의했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강하고 번영하고 성공적인 중국'의 부상을 인정하고, 중국도 미국이 아시아·태평양 국가임을 인정하며 이 지역 평화와 안정 및 번영에 대한 미국의 기여를 환영한다고 화답했다. 두 정상은 양국 간 긴밀한 관계를 다지기 위해 올해 안에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부주석이 상대국을 교차 방문토록 합의까지 했다.
미국과 중국이 서로의 영향권과 역할을 상호 인정했다는 점에서 이번 공동성명을 1975년 미국과 소련간의 헬싱키 최종협약에 비견하기도 한다.
오바마 대통령이나 후진타오 주석은 둘 다 냉철한 실용주의자며 미·중 간 대결을 원치 않고 있다. 무역부문에서 긴장이 일고는 있지만 실제 미·중 두 나라 경제는 너무 깊게 얽혀(deeply enmeshed)있어 이해관계를 가진 강력한 로비그룹들이 저마다 안정적인 양국관계를 원하는 처지다. 대결보다는 경쟁적 협력구도다.
이 거시적 로드맵이 한반도에서 대화국면을 향한 전략적 행보로 구체화되면서 남과 북의 등을 대화 쪽으로 떠밀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이 연초부터 북·일 직접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나선 것으로 미루어 남북 대화가 재개되면 6자회담 전에 남·북, 미·북, 일·북 이라는 3개의 양자대화가 동시에 진행될 가능성도 없지 않아 보인다.
중요한 것은 남북한 두 당사자들의 대응이다. 미·중의 독려에도 불구하고 남북대화가 순조롭게 재개될 지는 여전 불투명하다. 북한 측의 무조건적 대화재개에 우리 측이 '원칙 있는 대화'로 맞서며 서로 핑퐁게임을 벌이는 양상이 재연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남북한이 이런 대치국면을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 것이냐에 있다. 북한의 UEP가 사실일 경우 미국의 행보는 급해진다. 미국과 중국이 일정 기간 인내를 갖고 지켜보다 대화재개가 계속 교착상태에 맴돌 경우 자신들이 설정한 시간표와 로드맵에 따라 움직일 가능성도 배제 못한다. 이럴 경우 대화의 주도권은 빼앗기게 된다.
우리정부가 등 떠밀려 대화에 나서는 경우에도 주도권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한반도의 운명을 미·중이 아닌 우리가 주도하려면 남북 간에, 그것도 정상레벨에서의 일대 담판이 필요 불가결하다. 이명박 정부에게서 아직은 이런 의지가 읽혀지지 않는다.
더더구나 G2 시대의 개막은 한국이 앞으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떻게 처신해야하는 근본적인 고민을 안기고 있다. G2 시대가 현실화될 경우 가장 민감해야 할 나라가 한국이라는 얘기도 여기서 나온다. 북한의 도발이 한·미·일과 중국사이의 틈을 이용해 저질러졌다면 그 틈을 메우는 외교적 노력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필수적이다.
G20 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발로 한반도는 하루아침에 '동아시아의 화약고'로 세계에 각인됐다. 대북관계 하나 안정적으로 관리하지 못하면서 'G20 선진한국'과 '더 큰 대한민국'을 아무리 홍보해 본들 별 소용이 없다는 얘기가 된다.
이번 미중 정상회담을 통한 G2시대의 본격 개막과 한반도를 둘러싼 큰 틀의 외교게임은 한국외교에 위기이자 국가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일대 기회인 셈이다.
[약력] : 동아일보 경제부기자,워싱턴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주재 부국장, 경제담당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