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카드 '버블'이 심상치가 않다. 금융지주회사들이 카드 등 비(非)은행영역으로 '성역'없는 영업경쟁을 벌이면서 카드론 실적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카드론 이용자의 상당수가 은행에서 더 이상 돈을 빌리기가 어려운 저(低)신용자들, 은행부채를 떠안은 채 다시 빚을 지는 경우가 많아 2003년 '카드대란'의 악몽을 떠올리고 있다.
카드대출 규모와 연체율, 모집인 수 등 이른바 '카드과열'을 나타내는 지표로 볼때 아직 ' 2003년대란'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방치하면 '제2의 카드대란'으로 줄달음칠 조짐이 없지 않고, 지난주 금융당국 수장과 5개 금융지주 회장 간 조찬간담회에서도 이런 우려가 불거져 나왔다.
카드사의 자산은 작년말 현재 55조원으로 카드사태가 터지기 직전인 2002년말(68조원)이후 연말기준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작년 카드론 실적은 23조9000억원으로 전년보다 33.3%가 껑충 뛰었다. 2003년(37조원)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카드사의 몸집이 불어나면서 카드론 실적이 치솟은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카드사용문화의 정착과 카드사들의 마케팅이 서로 맞아 떨어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카드사가 정부압박 때문에 가맹점 수수료와 현금서비스 금리를 계속 낮게 가져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미(未)사용한도에 대해서는 대손충당금을 쌓지 않아도 되는 카드론으로 적극 눈을 돌린 것도 주효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우려되는 문제점 또한 만만치가 않다.
금융지주사들이 앞 다투어 카드론 시장에 뛰어들면서 '골목상권'인 서민금융의 영업기반을 흔들고 있다는 점이 첫째다.
KB국민카드가 전업 카드사로 독립 출범한 데 이어 우리은행과 농협도 카드사를 분사할 계획이어서 카드업체수는 2003년 카드대란 당시의 8개사를 웃돌 전망이다. 여기에 외환카드, 씨티카드는 물론 SC제일은행 카드사업부의 분사 가능성에다 산업은행과 우체국금융도 신용카드시장 진출계획을 밝힌 바 있다.
이 같은 경쟁적인 카드사 독립은 카드사가 '황금알 낳는 거위'로 불릴 정도로 장사가 잘 되기 때문이다. 작년 신한카드의 순이익은 1조1070억원으로 신한금융지주 주력계열사인 신한은행(1조6484억원)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서민금융을 파고들면서 은행보다 훨씬 높은 금리로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다는 비난마저 쏟아진다.
카드 한 장으로 언제든 외상으로 제한없이 현금을 쓸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는 곳은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카드사가 카드론 영업으로 저신용층을 적극 공략하면서 은행, 카드사, 캐피털, 저축은행, 대부업체 간 영업경계도 허물어졌다.
은행들의 문어발식 영업확장이 캐피털과 저축은행, 심지어 이명박 정부의 서민금융정책 브랜드인 미소금융까지 위협할 정도로 금융시장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얘기다.
한때 캐피털의 주 영업지대인 주택할부금융은 은행들이 주택담보대출에 열을 올리면서 시장을 잠식당했다. 저축은행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부실도 카드사의 시장잠식에서 촉발됐다는 지적 또한 따갑다. 저축은행들이 카드사들에게 소매금융의 영업기반을 빼앗겨 부동산 PF에 손댔다가 부실을 떠안게 됐다는 얘기다.
금융권역별로 영역구분이 흐려진 상황에서 한 곳에 부실이 터져 연쇄 도미노가 발생하면 전체 금융권의 위기를 불러올 우려가 다분하다는 점이 더 큰 문제점이다. 카드문제가 전체금융권은 물론이고 경제전체에 돌이킬 수 없는 악재로 작용하는 이른바 '카드 발(發) 시스템 리스크'의 현실화 우려다.
그러나 카드업계는 2003년과 지금은 상황이 완전 다르다고 주장한다. 카드사의 연체율은 카드대란 직후 25.1%에 달했으나 작년말에는 최저치인 1.68%까지 떨어졌음을 내세운다.
또 과거와는 달리 카드사들이 개인의 대출정보를 공유하고 있어 돌려막기 식 소비행태가 원천적으로 차단되고 있고, 카드발급심사도 까다로워져 길거리에서 카드회원을 모집하다가 적발되면 곧바로 제재가 가해진다는 점, 예전에는 아무런 검증 없이 카드를 발급해줬지만 지금은 신용을 철저히 조사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문제는 카드론 이용자의 상당수를 점하는 저신용층이 금리인상에다 높은 물가로 상환능력이 떨어져 가계부실로 이어질 우려가 다분하다는 데 있다. 저신용층인 8-10등급의 작년도 신규카드발급 건은 13만8817장으로 전년보다 17.6%가 늘었다. 또 지난해 신규 발급된 신용카드는 1200만개로 2009년에 비해 24%가 늘었다.
이 가운데 7-10등급 저신용자에 발급된 카드는 전체의 8.7%로 전년의 비중(6.6%)을 뛰어넘었다. 금리상승기라는 주변여건과 맞물려 카드론이 가계부실을 악화시킬 소지가 그만큼 커지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잖아도 가계부실은 시한폭탄과도 같은 존재다. 가계대출잔고는 800조원, 가계신용까지 포함하면 1000조원에 이른다. 지난 10년 새 연평균 증가율은 13%로 이 기간 중 GDP(국내총생산) 증가율(7%미만)의 배를 넘는다. 글로벌 금융위기 와중에서도 가계부채는 줄곧 늘어왔다는 점이 특이하다.
가계부채는 종전에는 집을 사거나 늘리기 위한 주택담보대출 위주로 늘어왔지만 근년 들어서는 사업자금이나 생계비용 자녀학자금 충당을 위해 주택을 담보로 돈을 빌리는 비율이 48%에 이르고 있어 심각성을 더한다.
한국의 가계부채는 그 수준이 너무 높고, 정책적 대응도 어려워 문제라는 바깥의 경고도 울리기 시작했다. 가계의 가처분소득에 대한 가계부채비율은 한국이 세계 최고수준이다. 부채가 느는 만큼 예금도 증가해 괜찮다고는 하지만 예금을 하는 사람과 돈을 빌리는 사람은 따로 따로라는 현실이 문제다.
또 가계대출연체율이 높지 않아 위험하지 않다고 하지만 원금은 그대로 둔 채 이자만 내며 버텨나가니까 통계상 연체율이 올라가지 않고 있을 뿐이다. 가계자산은 제자리이고 부채만 늘어가는 상황에서 집값이 내리고 주택거래마저 실종되면 가계의 유동성위기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번질 수 있다.
대출한도가 막히거나 생활에 쫒긴 저신용자들이 고금리의 대부업체로 내몰리는 것보다 카드론을 받는 것이 낫다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담보나 신용없이 언제든지 쓸 수 있는 카드사들의 현금서비스는 독약이 될 수 있다. 2003년 카드대란은 정부가 침체된 경기를 살리기 위해 규제를 대폭 풀어 신용카드사용을 장려한데서 촉발됐다.
금리가 오르면 가계대출 가운데 신용대출부문에서 가장 먼저 부실이 터진다.
카드사의 소액신용대출이 늘어나지 않도록 '묻지마 발급'과 현금서비스 한도 규제 등 선제적 대응이 절실하다. '카드 발(發) 시스템리스크'가 '가계부채 폭탄'의 뇌관으로 작용해 경제전체에 대재앙을 불러올 우려와 가능성을 사전에 면밀히 차단해야한다.
[약력] : 동아일보 경제부기자,워싱턴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주재 부국장, 경제담당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