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대선주자들이 속속 대선출마선언을 하면서 출발 대기선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여전 벤치를 지키고 있다. 사실상 마지막 주자로 남게 된 안원장이 언제쯤 출마를 선언할 것인지, 여러 설(說)만 무성할 뿐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은 없다.
그의 출마여부에 대한 정치권의 조바심은 야권 주자들은 물론이고, 여권의 유력주자 박근혜 경선캠프까지 초조하게 만들고 있다. 홍사덕 공동선대위원장이 대선을 5개월 남짓 앞둔 시점에서까지 출마선언도 안 하고 최소한의 검증시간도 주지 않고 있는 안원장의 행태를 꼬집으며 "국민에 대해 예의가 없는 사람"이라고 비판하고 나설 정도다.
이에 대해 안원장 측은 "국민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 "낡은 정치의 표본"이라고 맞받아쳤다. 안원장측이 새누리당측 발언에 정면 대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안원장의 에세이 출간이 임박하면서 대선출마에 대한 직·간접적인 의사표명 시기도 다가온 것 아니냐는 관측도 이래서 힘을 얻는다.
안원장이 '장고'(長考)를 하는 동안 일부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고문의 지지율이 오차범위내에서 안원장을 앞선다는 보도도 전해진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안원장에 대한 유권자의 피로감이 쌓인 것 아니냐, 출사표를 던질 시기를 놓쳤다는 섣부른 실기(失機)론도 등장한다.
그러나 지지율은 언론에 자주 노출되느냐의 여부에 따라 오르내리기 마련이이서 속단은 금물이다. 안원장을 자극하여 빨리 등판하도록 만들려는 기성 정치권과, 판세를 저울질하며 대선 참여 또는 개입 결단을 최대한 늦추려는 안원장측과의 심리전이 가열되는 상황이다.
안원장은 대선출마여부에 대해 "여전히 고민 중" 인 것으로 전해진다. "사회발전의 도구로 쓰인다면 정치도 감당할 수 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도 탐해서 선택하기보다는 사회발전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불가피하게 주어진다면 피하지 않겠다"는 입장만을 밝혔을 뿐 대권에 도전하겠다, 안하겠다고 딱 부러지게 언급은 않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지지율 조사에서 언제나 박근혜와 쌍벽을 이루고 있다. 박근혜를 앞서기도하고, 아슬아슬하게 따라잡으며 야권에서 제1의 지지도를 탄탄하게 굳히고 있다. 대권주자들이 줄줄이 나서고 있음에도 출마선언조차 하지 않은 인물에 대한 높은 지지는 '안철수 현상'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20대, 30대, 40대 '정치 환멸층'의 아픔을 보듬으며 그들의 눈과 귀를 딴 곳으로 못가도록 붙잡아매는 그의 존재감이 우리 정치권을 긴장시키고, 정치지형과 환경을 바꾸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치, 새로운 정당,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요구와 시대정신이 안철수라는 새로운 인물과 만나면서 '안철수 신드롬'(증후군)을 형성한 것이다.
그의 대선 출마여부가 지금도 안개속인데도 민주통합당은 안원장과의 2단계 경선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고, 새누리당 역시 박근혜 대 안철수 맞대결구도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대선주자들이 하나같이 경제민주화와 일자리, 복지를 내세우는 것도, 박근혜 후보가 20-40세대와 중도층 표심을 얻기 위해 중도 좌클릭을 불사하는 것도 모두 '안철수 현상'을 의식한 결과다. 대선에 나오던, 안 나오던 안철수라는 존재 그 자체가 대선국면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안철수 현상'은 지난해 9월1일 그가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할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시작됐다. 다음날 서대문구청에서 열린 청춘콘서트 후 "국회의원과는 달리 시장은 바꿀 수 있는 게 많다"며 시장출마 검토사실을 공식화했다. 9월3일 서울시장예비후보 10명을 대상으로 한 긴급여론조사에서 그는 39.5%의 압도적 지지로 2위 나경원후보의 3배 이상 지지율을 기록했다.
바로 사흘 후인 6일 그는 박원순 후보에게 양보하고 불출마를 선언했다. 5%대에 불과하던 박원순 후보지지율은 50%대로 치솟았고 나경원후보가 선두를 달리던 10․26 보궐선거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직접 출마하지 않았지만 그의 영향력이 판세를 가른 것이다.
안원장의 대선출마여부는 경선판도를 일거에 뒤흔들 수 있는 폭발력을 지닌다. 안원장이 민주당경선이 끝난 이후인 9월말 이후로 출마선언을 늦출 것이라는 시나리오는 이 '9월의 전설'을 떠올리게 한다. 그가 직접 출마할 수도 있고, 서울시장 보선 때처럼 경쟁자에게 양보하고 그를 지지해 승리를 도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선출마냐, 특정후보에 대한 지지를 통한 대선개입이냐의 여부는 곧 '안철수의 정치'다. 안원장이 굳이 정치에 나서야할까. 그 스스로 "보수와 진보 모두가 나라와 국민을 위해 쇄신노력을 한다면 나 같은 사람까지 정치 고민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정치참여를 하겠다고 하면 그때부터 서로 싸우고 공격의 대상이 돼 긍정적인 역할을 못 한다. 내가 우리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역할은 이 자리에 있으면서 양쪽을 끊임없이 자극해서 쇄신의 노력을 다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각 분야에서 성공한 사회적 명망가들이 정치일선에 뛰어들어 꿈의 실현은커녕 '하이에나'들에게 뜯기고 물리어서 만신창이가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자신을 통해 분출된 사회적 열망을 실현하는 데는 굳이 본인자신이 '살벌한' 정치판에 뛰어들지 않아도 된다.
안원장은 성공한 벤처기업가로, 능력 있고 사회정의를 중시하는 겸손하고 따뜻한 이미지가 장점이다. 백신프로그램을 무료로 배포해 사회적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고, '청춘콘서트'나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시민들과 활발히 소통했다. 재벌기업과 중소기업과의 관계를 '동물원'으로 비판해 기성정치권과는 남다른 모습을 보여 왔다.
사회민주주의자도 시장만능주의자도 아니어서 보수우파도 진보좌파도 그에 대한 거부감이 크지 않아 보인다. 현재 한국 민주주의에 가장 불길한 적신호는 양극단의 이념구도다. 이 악성바이러스를 치유하는 '백신 하이브리드 정치'를 기대하는 열망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국민적 검증이 없었다는 이유로 일각에서 그의 리더십을 의심하지만 정치인의 도덕성, 시민정치의 가능성, 이념구도보다는 '실생활 정치'를 실현하는 제3의 정치 공간 창출에 그만한 적임자도 없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안철수현상이 '묻지마 지지'에 의한 '정치적 신기루'인지, 확실한 정치적 실체인지는 시간이 답할 것이다. 다만 현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그가 직접 나서건, 나서지 않건 그의 존재자체가 한국정치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고, 그의 '장고' 또한 '안철수의 정치'라는 점이다.
여야의 대선주자들은 속이 타겠지만 국민들 입장에서 흥미진진하고 역동성 있는 2012 대선레이스가 아닐 수 없다.
[약력] :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워싱턴 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 주재 부국장, 경제담당 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