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민주화 관련 법안이 국회 입법수순에 접어들면서 정부와 재계, 여야, 그리고 여권 내부 간에 갈등이 본격화하고 있다.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이 중심이 된 여야 6인 협의체는 공평하고 정의로운 상생협력의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들의 개정을 올 상반기 중에 추진키로 합의했다.
국회 정무위원회에 관련 법안들이 경쟁적으로 쏟아지고, 재계는 "자고나면 의원들이 법안을 늘려 어떻게 될지 몰라 투자계획도 세우지 못한다"고 푸념이다. 상정된 관련 법안들이 법안심사소위에서 논의에 들어가기 무섭게 경제민주화에 대한 우려 또한 기다렸다는 듯 각계에서 쏟아지고 있다.
총수직계가 30% 이상 지분을 가진 계열사끼리는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래 자체를 불법으로 간주하겠다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선보인데 이어 연봉 5억원 이상의 재벌총수 및 최고경영자의 연봉을 공개하도록 한 자본시장법 개정안, 그리고 납품단가 후려치기에 피해액의 최대 3배까지 손해배상을 물리는 하도급법 개정안이 법안심사소위를 통과했다.
'1라운드 규제'안의 윤곽이 드러나자 박근혜대통령이 제동을 걸고 나섰다. "대선공약이 아닌 것도 포함돼 있는데 무리한 게 아닌지 걱정된다"고 '우려'를 제기한 데 이어 "경제민주화는 어느 한 쪽을 누르고 옥죄는 게 아니다. 대기업이란 이유로 벌주는 식의 때리기로 가서는 안 된다"고 거듭 침을 놓았다.
원내협상을 책임지고 있는 이한구 원내대표도 "국회에서 계속 악의적 시각을 갖고 대중인기에 영합하는 식으로 접근하면 경제 살리기가 힘들다"며 비판에 가세했다.
대통령이 사실상 입법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이라며 야권이 반발하자 박대통령은 "내가 공약한 것도 이미 상당히 센 것이다. 하지만 도가 지나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고 해명했고, 그러면서도 "경제민주화를 반드시 하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문제는 박 대통령의 이런 '우려 표시' 이후 새누리당의 기류가 달라졌다는 데 있다. 지난 19일 열린 정무위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선 대기업 계열사의 부당내부거래(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강화하는 내용의 공정거래법 개정안 등을 논의했지만 별다른 진전 없이 회의가 끝났다. 대통령에서 비롯된 속도조절론이 여권내부에서 힘을 얻어가면서 입법의 1차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분석도 따른다.
논의 중인 경제민주화 입법안 가운데 어떤 것이 박 대통령 '공약 밖'의 것이고, '무리'한 것인지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박 대통령은 대선 공약집에서 '일감 몰아주기 금지 강화', '골목상권 보호', '하도급 불공정 피해방지',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 '재벌에 대한 사면 제한' 등을 약속했다. 이를 위한 입법 과제로 공정거래법·유통산업발전법·하도급법·가맹사업법·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의 개정을 제시한 바 있다.
현재 국회에서 여야가 심의중인 관련법 개정안들과 외형상 다를 게 없다. 논란의 핵심으로 지목된 '일감 몰아주기' 규제입법 조차 '공약 안'의 것이기 때문이다.
'공약 밖의 무리한' 입법은 대기업 총수·임원의 연봉 공개 관련 입법으로 전해진다. 이 사안은 당초 대선 공약에 넣으려다 경제민주화와는 무관하고, 노조가 사주를 공격할 빌미가 돼 노사분규의 불씨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 뺐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대기업 임원 보수공개는 선진국에서 일반화돼 있어 '대기업 때리기'로만 보는 것은 무리다.
박 대통령이 '무리한 법안'으로 지목한 것은 재벌총수의 사익 편취를 막기 위해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강화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이라는 것이 정치권과 재계의 대체적인 견해다.
부당내부거래, 이른바 일감몰아주기는 재벌의 대표적 불공정거래행위로 지목된다. 공정위 조사에 따르면 민간대기업집단의 계열사 85.2%가 부당내부거래를 하고 있고, 내부거래의 88%가 수의계약이다. 광고, 물류, 시스템통합 분야에서 특히 두드러지고 빵집, 소모성 자재구매 대행 등 서민형 업종으로까지 확대일로다.
부당내부거래는 재벌 2.3세의 편법적 상속·증여 수단으로 악용되고, 그 수익은 총수 개인과 일가 등 특수 관계인이 향유해 기업이익의 총수일가 편취로 이어진다.
이를 근절시키기 위해 과징금을 매출액 최대 5%에서 10%로 올리고, 총수일가의 지분이 30% 이상인 대기업계열사가 '일감몰아주기'로 적발될 경우 총수 등이 관여한 것으로 보고 추가조사를 통해 형사처벌을 가능케 하는 방안이 논의 중이다. 일반 범죄와는 달리 기업 스스로 무죄를 입증할 책임을 부여하고, 공정위는 이를 전담할 부서, 이른바 '재벌전담조사국' 신설도 검토한다는 것이다.
재계는 "계열사 간 정당한 거래까지 자의적인 규제와 처벌을 가능토록 하는 법"이라며 극력 반발한다. 오는 7월부터 일정 비율이상 내부거래는 증여세를 부과토록 제도가 바뀌었는데 여기에 '형사처벌'과 과징금까지 강화하면 '3중 처벌'이 된다는 반론이다.
'30% 룰', 그리고 기업이 스스로 무죄를 입증토록 한 것은 여권내부에서도 무리하다는 지적이 많아 국회통과 전망은 극히 불투명하다.
대통령의 우려표명이후 재계는 물론 일부 보수시민단체와 학자들이 경제민주화 관련 입법논의에 제동을 걸고 나서고, 재계의 반발-청와대의 견제-법안폐기로 이어진 과거 경제민주화 실패사례의 재연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박대통령의 발언이 시장에 혼선을 주고 경제주체 간 갈등을 키운 것은 분명하지만 공약이행을 중시하는 박대통령의 스타일로 볼 때 어떤 식으로든 관련 법안들이 국회를 통과할 것이라는 전망이 여전히 우세하다.
현오석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도 "기업에 경제민주화는 이제 변수가 아닌 상수다. 여기에 기업이 맞춰 적응해야한다"고 강조하고 나서는 상황이다.
경제민주화가 기업투자와 성장을 해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기업이 투자를 머뭇거리는 것은 마땅한 투자대상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정부가 압박하거나 달랜다고 투자가 늘어날 수는 없다.
경제민주화는 시장경제의 적(敵)이 아니라, 시장경제의 원활한 작동을 보장하는 안전장치를 갖추는 과정이다. 지속적인 성장과 일자리창출을 위해서도 경제민주화는 필요하다.
일감몰아주기나 횡령 배임 탈세의 근절은 기업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경제정의다. 앞으로 국회의 법안 통과과정에서 상당한 진통이 예상되고, 이 과정에서 한국적 현실과 최적(最適)의 절충점을 찾는 지혜가 중요하다.
이를 위해 정부는 경제민주화에 대한 논의를 다각도로 충분히 진행시키고, 국회는 가장 효율적인 규제체계를 만드는데 힘을 모아야한다. 속도조절은 있어도 후퇴는 안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