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과 정치인의 음성적 돈거래나 검은돈의 창구로 활용되는 차명계좌는 그 규모를 상상하기도 힘든 상황.
정부와 정치권은 새 정부 출범 후 강화되는 지하경제 추적과 세수 확보를 위해, 대대적인 차명거래 근절을 추진중이다.
제18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차명거래 금지가 논의된 바 있으며, 최근 정치권에서는 차명거래의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의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 상정을 앞두고 있다.
금융실명제 도입 후 20년이 흘렀지만, 온갖 거대 자본을 위한 비리의 온상이 된 차명계좌. 조세일보(www.joseilbo.com)는 차명거래 실태를 진단, 현행법의 문제점을 짚고 정부 등이 추진중인 제도 개선 사항들을 살펴봤다.
'과거 차명계좌 사건의 조명과 불법적인 차명거래의 현실', '금융실명거래법의 개정 논의 현황', '금융위원회와 국세청, 금융계가 바라보는 차명거래의 문제점'을 주제로 3차례에 걸쳐 보도한다. - 편집자 주
'선의의 차명 계좌' 처벌될까, 법안 개정 발목 잡아
금융위 우려…"기술적 검토 더 필요, 과세 목적은 안돼"
방대한 지하경제 추적 가능, 국세청 본격 논의 기다려
거액의 차명 거래 중 상당수는 지하경제와 연결된다.
차명 거래 금지에 대한 논의는 오랜 기간 있어왔지만 새 정부 들어 그 필요성이 커진 것은, 주요 국정 과제인 '지하경제 양성화'와 차명 계좌가 직접 관련이 있고, 이를 통해 어마어마한 세수 확보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융계의 시각에서 볼 때 차명 거래의 원천 차단은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현행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은 은행원이 본인 확인 의무를 소홀히 한 경우 은행에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돼 있다. 이는 일반적인 차명 거래, 즉 가족 간의 명의 수탁이나 친목에 의한 공금(동창회 등) 등을 처벌할 명분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금자보호법상 정부가 보장하지 않는 5000만원 초과액을 가족의 명의로 예금하는 경우도 이러한 선의의 차명 거래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정부 부처 간 혼란도 가중되고 있다. 국세청은 차명 거래 금지를 통해 세수 확보를 추진하려는 반면, 금융위원회는 좀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 국세청, 인수위에서 차명 계좌 금지 건의 = 정치권과 정부 당국에 따르면 국세청은 18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차명 계좌의 처벌을 강화할 것을 건의한 바 있다.
하지만 주요 국정 과제에 포함되지 않았다가 최근 들어 정치권에서 차명 거래와 관련한 법안 개정 논의가 활발해지자 이를 주시하고 있는 분위기다.
국세청 관계자는 "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해 정부 기관들이 금융거래 정보의 공유를 확대하는 법안 개정도 추진 중이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차명 거래를 금지하기 위한 논의가 좀 더 본격화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인수위와 관련해 직접적인 언급은 피했다.
그는 "인수위에서는 건의 정도를 하는 것에 그쳤고, 현재 국세청이 직접 나서 추진할 일은 없다. 아직 정해진 것이 없는 상황이다"고 덧붙였다.
최근 여야 정치권이 모두 나서 금융실명거래법 개정을 추진하는 상황이라, 국세청이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한 정부 당국 관계자는 "정부가 아니어도 정치권에서 논의가 활발한 터라, 국세청이 직접 나서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박민식 새누리당 의원과 민병두 민주당 의원은 금융실명거래법 개정안을 발의하거나 공청회를 열어, 차명 거래 처벌의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에 앞서 김기준 민주당 의원도 지난해 차명 계좌 거래자에게 과태료를 부과하는 내용의 법안을 추진했다.
■ "일반 거래와 금융거래는 달라" 금융위 신중한 태도 = 그동안 차명 거래에 대한 처벌이 미뤄진 것은 가족이나 동창회 등 당사자 간 합의된 차명 계좌까지 단속의 대상이 될 경우 선의의 피해자가 생기고 또 다른 편법이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에서다.
한마디로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우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
이달 열린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차명 거래 문제는 국회와 학계에서 이미 많이 논의돼 왔는데, 선의의 차명 거래를 다양하게 인정하고 있다. 금융실명거래법으로 선의의 차명 거래를 차단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또 새 정부가 세수를 늘리기 위해 차명 계좌를 타깃으로 삼는 것은 잘못됐다는 비판도 나온다.
금융 당국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지하경제 양성화를 명분으로 눈에 보이는 것은 뭐든지 한 번씩 건드려본다는 느낌"이라고 지적했다.
민병두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을 살펴보면 차명 계좌의 금융자산을 명의자의 것으로 간주하는, 즉 증여를 의제하는 것이 규정돼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금융위는 부정적이다.
금융위 고위 관계자는 "부동산실명제에서는 이러한 증여 의제를 허용하는데, 실물거래와 금융거래는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예컨대 금융거래는 당사자 간 합의에 따른 차용이나, 물품의 대가로 지급하는 거래 계약 등 다양한 종류가 있는데 이로 인해 엉뚱한 피해자가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차용증서를 받고 돈을 빌려줬는데 이 돈이 차명 계좌로 입금된 경우 재산권을 요구할 방법이 없어지는 등의 사례가 생길 수 있다. 따라서 선의의 차명 거래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굉장히 기술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차명 거래에 관한 법 개정의 추진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그동안 차명 거래를 단속하면 금융기관에만 적은 과태료가 부과됐는데, 이는 혼을 낼 사람이 없으니까 '만만한 네가 뺨 한 대라도 맞아라'는 논리였다. 제대로 된 처벌은 누구도 받지 않았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