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과 정치인의 음성적 돈거래나 검은돈의 창구로 활용되는 차명계좌는 그 규모를 상상하기도 힘든 상황.
정부와 정치권은 새 정부 출범 후 강화되는 지하경제 추적과 세수 확보를 위해, 대대적인 차명거래 근절을 추진중이다.
제18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차명거래 금지가 논의된 바 있으며, 최근 정치권에서는 차명거래의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의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 상정을 앞두고 있다.
금융실명제 도입 후 20년이 흘렀지만, 온갖 거대 자본을 위한 비리의 온상이 된 차명계좌. 조세일보(www.joseilbo.com)는 차명거래 실태를 진단, 현행법의 문제점을 짚고 정부 등이 추진중인 제도 개선 사항들을 살펴봤다.
'과거 차명계좌 사건의 조명과 불법적인 차명거래의 현실', '금융실명거래법의 개정 논의 현황', '금융위원회와 국세청, 금융계가 바라보는 차명거래의 문제점'을 주제로 3차례에 걸쳐 보도한다. - 편집자 주
정부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운다"…선의의 피해 우려
민병두 의원, 증여 의제 개념 도입…법리적 논란 소지 줄여
차명 거래를 금지하는 사회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천문학적 규모의 검은돈이 오가는데 차명 계좌가 이용되는 원인은 무엇일까.
국제기구들은 자금 세탁 방지에 대한 국제 기준을 제정해 선진국들에 권고하고 있으며 한국도 2001년 금융정보분석원(FIU)을 설립, 금융거래 정보를 수집하고 불법 자금 거래의 추적에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현행법은 미비점이 많고 처벌이 약해, 이러한 차명 거래를 사실상 방조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은 이미 오랜 기간 차명 거래를 금지할 법적 장치의 마련에 고심하고 있지만, '선의의 차명 거래'마저 처벌하거나 원천 차단하는 부작용이 우려되고 있다.
예를 들어 탈세나 조세 회피를 찾기 위해 차명 거래 자체를 처벌했다가 일반인 거래자들, 즉 선의의 피해자가 생겨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 거래자·명의자 둘 다 처벌 필요, 정치권 법안 개정 시도 수차례 = 지난 10일 민병두 민주당 의원은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개정안, 이른바 '차명 거래 금지법'을 발의했다.
개정안의 핵심은 금융거래에서 가명을 포함해 합의에 의한 차명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만일 이를 위반하면 금융회사뿐 아니라 거래자, 명의자 둘 다 처벌을 받는다.
박민식 새누리당 의원도 금융실명제 개선을 위한 정책 토론회를 열고 법안 개정을 준비중이다.
앞서 2010년에는 주광덕 전 새누리당 의원과 박선숙 전 민주당 의원이 차명 계좌 거래자 및 명의자에게 벌금과 징역형을 처하는 법안을 발의한 바 있다. 김기준 민주당 의원도 지난해 차명 계좌 거래자에게 과태료를 부과하는 내용의 법안을 추진했다.
이처럼 여야 모두 차명 거래의 문제점을 깊이 인식하고 있으나 걸림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족이나 동창회 등 당사자 간 합의된 차명 계좌까지 단속의 대상이 될 경우 선의의 피해자가 생기고 또 다른 편법이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본격적인 논의는 계속해서 미뤄져왔다.
17일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민병두 의원은 "이번 CJ나 전두환 전 대통령 사건 등은 금융실명제 의무가 금융기관에만 부여되면서 차명을 부추긴 탓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정부의 입장은 조심스럽다.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우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신제윤 금융위원회 위원장은 "차명 거래 문제는 국회와 학계에서 이미 많이 논의돼 왔는데, 선의의 차명 거래를 다양하게 인정하고 있다. 금융실명제법으로 선의의 차명 거래를 차단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범죄와 관련된 차명 거래의 경우 처벌을 강화하는 것이 맞지 않나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금융위 고위 관계자는 "차명 거래를 처벌해야 한다는데는 동의하지만, 선의의 거래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 금융실명거래법에 증여 의제 적용 추진 = 그동안 차명 거래를 규제하지 못한 것은 입증 곤란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민병두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에 따르면 차명 계좌의 금융자산을 명의자의 것으로 간주한다.
'부동산 실권리자명의 등기에 관한 법률'이나 '상속세 및 증여세법'과 마찬가지로 증여를 의제(擬制)해 실제 거래자가 명의 수탁자에게 이익 반환 청구를 할 수 없도록 금지하는 것.
한마디로 차명 거래를 하면 위탁한 자산을 돌려받을 수 없다. 거래자의 명의자에 대한 증여 의제로 간주하면 입증 곤란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며 이는 다른 법안들이 이미 적용한 것이라 법리적 논란의 소지가 적다는 게 민병두 의원 측의 설명이다.
한편, 국세청도 차명 거래를 처벌하는 방안을 제18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새 정부의 국정 과제 중 하나인 지하경제 양성화를 이루고 세수 확보가 시급한 국세청 입장에서는 FIU의 금융거래 정보 공유를 확대하는 방안과 함께 차명 거래의 추적도 필요한 상황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인수위에서 논의된 사항은 각 부처 간 아이디어 공유 차원이었고, 아직 정해진 것이 없어 밝힐 수 없다"면서도 "현재 문제 되고 있는 선의의 거래에 대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차명 거래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를 기준으로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중 지하경제 규모는 23%(290조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3%)과 비교하면 무려 10%포인트 차이가 나며 개도국 평균(26.2%)과는 비슷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