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검찰의 CJ그룹 수사로 대기업의 차명계좌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기업뿐 아니라 검찰 간부의 뇌물 수수나 전직 대통령 및 가족들과 관련된 불법적인 정치자금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차명계좌는 빠지지 않고 있다.
대기업과 정치인의 음성적 돈거래나 검은돈의 창구로 활용되는 차명계좌는 그 규모를 상상하기도 힘든 상황.
정부와 정치권은 새 정부 출범 후 강화되는 지하경제 추적과 세수 확보를 위해, 대대적인 차명거래 근절을 추진중이다.
제18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차명거래 금지가 논의된 바 있으며, 최근 정치권에서는 차명거래의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의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 상정을 앞두고 있다.
금융실명제 도입 후 20년이 흘렀지만, 온갖 거대 자본을 위한 비리의 온상이 된 차명계좌. 조세일보(www.joseilbo.com)는 차명거래 실태를 진단, 현행법의 문제점을 짚고 정부 등이 추진중인 제도 개선 사항들을 살펴봤다.
'과거 차명계좌 사건의 조명과 불법적인 차명거래의 현실', '금융실명거래법의 개정 논의 현황', '금융위원회와 국세청, 금융계가 바라보는 차명거래의 문제점'을 주제로 3차례에 걸쳐 보도한다. - 편집자 주
30억원 넘는 거액의 금융자산이 확인된 노태우 전(前) 대통령 운전기사의 의심스러운 계좌들.
페이퍼 컴퍼니도 모자라 노숙인의 이름까지 빌려 만들어진 전두환 전 대통령 아들들의 가짜 계좌.
1980년대 거액의 어음 사기로 드러난 장영자·이철희 사건은 금융실명제 도입의 발단이 됐지만, 이후 2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차명 계좌는 여전히 거대 권력의 돈세탁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불법적인 유령 계좌로 수십만 달러의 돈이 순식간에 오가는 모습은 영화에서만 나올 법한 이야기가 아니다. 차명 계좌는 대기업의 비자금이나 음성적인 정치자금, 탈세와 탈루의 온상이 되고 있는 현실이다.
과거에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을 포함해 라응찬 신한금융지주회사 회장과 김찬경 미래저축은행 회장도 수십에서 수백 개의 차명 계좌를 이용한 사실이 알려지며 사회에 충격을 줬다.
최근에는 프로포폴(마취제로 쓰이는 향정신성의약품)을 불법 거래한 병원이나 건설업자의 성 접대 의혹 등 수상한 돈거래에도 차명 계좌가 동원됐다.
■ 유명무실한 금융실명제, 법적 공백 방치돼 = 현행 금융실명거래법은 사실상 차명 거래를 방조하고 있다.
금융 실명 거래의 의무는 금융회사에만 주어지며, '실명인지 아닌지를' 규제하되 합의에 의한 차명은 규제하지 않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금융실명제가 도입된지 20년이 흘렀어도 법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1993년 금융실명제는 실시 과정부터 수많은 시행착오를 낳았다.
금융거래 내역이 정부에 통보될지 모른다는 일반인의 불안 심리가 확산되고, 대기업을 대변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외환 위기 당시 금융실명제의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다.
현재 가명이 아닌 실명(실존 명의) 거래는 100%에 가까워졌지만, 타인의 명의를 이용한 차명(명의 수탁) 계좌의 규모는 추정조차 힘들다는 것이 정부 측의 입장이다.
금융정보분석원(FIU)의 한 관계자는 "차명 계좌라는 것이 사법 당국의 수사 결과가 나온 뒤에 밝혀지는 것이라 집계가 어렵다"고 밝혔다.
정치권에서는 차명 거래에 대한 처벌 강화를 오랜 기간 논의해왔다.
박선숙 전 민주당 의원은 차명 거래를 한 자에게 계좌 자산의 30%를 과징금으로 부과하고 최대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는 법안을 추진한 바 있다.
최근 민병두 민주당 의원은 차명 거래의 책임을 금융회사뿐 아니라 실소유주, 명의 수탁자에게도 부과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지난해 대선 당시 여당의 싱크 탱크였던 국가미래연구원과 국세청도 차명 거래 금지를 추진하다가 표류한 상태이다.
■ 현행법 '금융회사'에 솜방망이 징계, 실소유주는 빠져나가 = 최근 우리은행과 한국씨티은행이 차명 계좌를 운용한 사실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적발되며 과태료 처분을 받았다. 과태료는 우리은행이 3320만원, 한국씨티은행이 600만원을 냈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처벌이 약한 것도 문제이지만 차명 계좌의 책임을 금융회사에만 묻는 것도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차명 거래에 대한 처벌을 실소유주뿐 아니라 명의를 빌려준 자에게 적용할 경우 차명 계좌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무분별하게 양산되는 예금계좌도 이러한 차명 거래를 양산하는 문제 중 하나로 꼽힌다.
가명이나 무기명 거래는 현저하게 줄었지만 일반 예금자의 계좌 수조차 집계되지 않는 상황에서 차명 거래 단속은 어렵다는 지적이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일반인 거래와 차명 거래가 직접적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예금계좌가 흔해지면서 새 계좌가 수시로 생겨나고 해지되고 있다. 이는 큰 틀에서 보면 차명 계좌 등 음성적 거래를 양산하는 원인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의 금융기관은 예금계좌를 개설할 때 신원 확인이 철저하게 이뤄진다.
이 관계자는 "외국에서는 예금계좌 하나를 만들더라도 여러 날이 걸리는데 우리나라처럼 쉽게 쉽게 만들어지는 제도 자체가 문제의 원인을 만들고 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금감원에 따르면 허술하게 위조된 신분증을 이용해 예금계좌를 신청해도 이를 알아채지 못해 분쟁에 휘말린 시중은행들이 있어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