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대한민국 경제를 살리기 위한 특단의 조치로 강도 높은 '규제개혁' 카드를 꺼내들었다. 기업들과 국민들의 역량이 뛰어나도 '암덩어리' 같은 규제들이 이를 가로막고 있다면 경제 활성화는 머나먼 얘기라는 것이 핵심요지다.
사실 세법은 규제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다만 이는 사전적 범주일 뿐이며 현실에서의 세법은 국민과 기업 등에 '규제' 중 하나로 인식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잘못된 세법은 국민의 개개인의 생활, 개별기업의 경영에 막대한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세일보(www.joseilbo.com)는 내국세와 관세 등 세법 속 개혁해야 할 규제들을 선별해 개선을 촉구하는 [캠페인]세법 속 '규제', 이것만은 고치자 시리즈를 연중기획으로 보도한다. -편집자주-
#. 중국에서 인천공항을 거쳐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른 A씨는 인천공항에서 항공기 결함으로 출발시간이 지연되자 속이 타들어갔다.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의 건강이 염려됐기 때문이다. 승객들의 항의가 이어지자 항공사는 샌드위치와 우유를 제공하며 승객들의 양해를 구했다. 이가 좋지 않아 음식을 잘 씹을 수 없는 할머니를 위해 A씨는 항공사에 밥이나 죽 종류의 기내식을 요구했다. 하지만 항공사는 현행법상 제공이 불가능하다며 거절했고 A씨는 이를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해외여행을 하다보면 간혹 기상악화 또는 항공기 결함 등의 이유로 비행기의 출발이 지연되면서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황금 같은 시간을 공항에서 소비해야 하는 여행자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다. 환승대기 여행자의 특성상 공항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막연히 기다리자니 예정된 다음 일정이 차질을 빚기도 한다.
대기시간이 길어지면 항공사에서 식사와 숙박을 제공하기도 하는데, 현행법상 식사 제공이 샌드위치나 빵 정도만 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기내식은 죽이나 밥, 면, 스테이크 등 다양한 음식을 제공하면서 유독 환승대기 고객에게만 빵과 우유를 제공하는 것을 보면 항공사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그러나하는 생각마저 들게 만든다.
현행법상 식사 제공은 빵과 우유 정도로만 한정되어 있다고 설명하더라도 이를 납득하는 여행자들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관세청은 왜 환승대기 승객들이 먹는 식사메뉴까지 법으로 정해놨을까?
□ 식사메뉴 규정 때문에…수억원 '줄줄' = 현행법상 환승 승객, 즉 출국대기자에게 제공할 수 있는 식음료는 샌드위치, 빵, 스낵류 등 간이식과 주스와 우유 등의 음료수다.
이는 '선(기)용품 및 선(기)내 판매용품의 하역 등에 관한 고시'에 따른 것으로 항공기 뿐 아니라 선박을 통해 해외로 출국할 때에도 해당된다. 이 고시는 10년 전인 2004년 개정된 이후 단 한 번도 개정되지 않았다.
이 고시에 따라 항공사들이 보세공장에서 생산한 기내식의 음식류 제공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에 항공사들은 항공기의 출발이 지연되거나 할 경우 샌드위치나 빵, 우유와 주스 등을 외부에서 구매해 승객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문제는 이를 사온다고 하더라도 무작정 승객들에게 제공할 수도 없다.
항공사가 승객들에게 몇인분의 간이식을 제공한다는 것을 관세청에 신고해야 하며 관세청에서 이를 허가해주면 비로소 승객들에게 간이식 제공이 가능하게 된다.
이런 절차상 문제와 외부음식 구매 등으로 항공사들은 연간 수억원의 불필요한 비용을 지출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대한항공은 연 3억6000만원, 아시아나항공은 연 2억원을 지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뜩이나 항공기 출발 지연으로 예민해진 승객들에게 양질의 식사를 제공할 수는 없으면서 불필요한 지출비용만 늘어나면서 항공업계에서는 관련 고시 개정을 꾸준히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 "불합리한 규정, 기내식은 '면세' 때문" = 관세청이 선박이나 기내에 관한 제공가능 물품을 지정해놓은 이유는 바로 '면세물품'이기 때문이다. 선박이나 기내는 면세물품을 취급할 수 있는 일종의 보세구역으로 분류되며 여기서 제공되는 식사와 주류 등은 모두 면세이다.
면세점에서 물건을 세금없이 살 수 있는 이유도 해외로 나가서 선물하거나 사용할 물품을 구매하는 것을 전제로 한 것과 같은 맥락인 셈이다.
하지만 항공기의 출발지연으로 대기하는 승객에게 제공하는 음식은 우리나라에서 소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세금을 내야 한다. 같은 음식을 먹는데 공항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면세를 받는 것은 조세형평성 측면에서도 어긋난다.
이에 관세청에서는 면세물품을 제공하거나 구매하는 것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대기 승객이 먹는 음식조차 이런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너무하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이런 지적이 잇따르자 관세청은 출국 대기자에게 빵과 우유만 제공하도록 한 고시를 오는 6월까지 개정해 보세공장에서 생산한 기내식까지 제공이 가능하도록 할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
관세청 관계자는 "항공기에서 사용되는 용품은 국내 소비가 아닌 것이 원칙"이라며 "항공기가 지연되거나 하면 항공사에서 기내에 준하는 식사를 제공해줘야 하는데, 빵과 우유 등의 간이식 정도는 원칙에 벗어나지는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빵을 못 드시는 분도 있다보니 제공가능한 식음료를 제한했던 것을 개정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