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 체결에 따라 미국과 유럽과의 교역량이 늘어나고 우리나라 기업들도 각종 혜택을 받고 있지만 '원산지 검증'을 지원하기 위한 관세청의 '원산지 포괄확인서 사전확인제도'가 빛 좋은 개살구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원산지 검증이란 FTA 협정을 체결한 상대국에서 우리나라 기업이 수출한 제품이 한국산이 맞는지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것으로 우리나라 기업이 특혜관세 혜택을 받으려면 상대국에 원산지확인서를 반드시 제출해야 한다.
상대국 세관에서는 원산지확인서 등을 검토한 후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원산지가 맞는지 우리나라 세관에 검증을 요청하거나 해당 기업을 직접 조사하기도 한다.
원산지가 아니라고 판명나면 기업은 세금을 토해내야 한다.
특혜관세로 기업에게 세금을 깎아주는, 일종의 혜택을 주다보니 미국과 유럽 등 FTA 체결국에서는 원산지 검증을 보다 까다롭게 하고 있다. 상대국의 검증요청은 2011년 84건, 2012년 222건, 2013년 291건으로 계속 증가하는 추세이다.
한·EU FTA가 발효된 지 4년, 한·미 FTA가 발효된지 3년이 지나면서 원산지 검증의 중요성이 확대되고 상대국의 원산지 검증 요구도 늘어나면서 관세청도 기업들에게 중요성을 홍보하고 각종 지원책도 내놓고 있다.
하지만 기업들의 인식부족과 관세청 지원제도의 낮은 체감도 때문에 기업들의 활용률은 현저하게 낮은 상황이다.
□ '유명무실'한 사전확인제도(?) = 원산지 증명서류를 발급하는 일은 까다롭고 복잡해 원산지 관련 전문인력이 없는 중소기업에서는 이를 자체적으로 발급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원재료 구매에서부터 공장 제조과정과 제품 생산 등 전반에 걸쳐 원산지를 관리해야 하는 것은 물론 하청업체가 있을 경우 하청업체 역시 수출업체에 원산지 관련 서류를 제공해야 한다.
원산지 관리가 어렵다보니 관세사들은 제품이나 제조과정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적게는 100만원에서 많게는 수천만원까지 FTA 컨설팅 비용을 받고 있다. 중소(영세)제조업체의 경우 이런 비용을 감당하기가 어려워 원산지 증명을 포기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로 발생하고 있다.
관세청에서는 이런 중소제조업체를 지원하기 위해 원산지포괄확인서에 대한 세관장 사전확인제도를 지난해 시범운영한 뒤 올해 2월부터 시행하기 시작했다.
기업이 원산지 증명 관련 서류를 관할지 본부세관에 제출하면 세관장은 서류심사와 현장실사 등을 통해 원산지 기준과 품목분류 충족여부, 재료·제품 재고관리를 점검하고 원산지확인서를 발급해준다.
이 제도는 기업들에게 무료로 지원되는 것이지만 지난해 11월부터 현재까지 사전확인제도를 활용한 기업은 관세청 FTA 포털 공개된 23개 업체에 불과했다.
2012년 기준 중소제조기업 수가 11만6174개인 것을 감안하면 23개라는 숫자는 비율을 계산하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중소제조기업 전부가 FTA와 관련이 있는 기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중 5%만 FTA 수출과 관련이 있는 업체라고 가정해도 23개라는 숫자는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 취지는 좋은데…책임은 누가? = 중소기업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취지로 도입된 사전확인제도를 활용하는 기업이 적은 이유는 홍보부족도 있지만 제도의 불완전성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원산지 증명이 중요한 이유는 FTA 체결 상대국으로부터 관세 혜택을 받기 위함인데 원산지 증명 서류에 문제가 있어 세금을 토해내야 한다면 이 책임을 누가 지냐는 것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세관을 믿고 원산지확인서를 발급받아 제출했기 때문에 세금을 추징당한다면 억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현재 세관에서는 기업들에게 책임 소재에 대해 전혀 안내해주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세관장 사전확인제도를 통해 원산지확인서를 발급받은 한 기업 관계자는 "원산지 인정이 되지 않아 세금을 내야하면 누가 책임져야 한다는 안내를 받은 적이 없다"며 "세관에서 하는 FTA 활용 교육을 갔을 때 원산지 검증에 문제가 생기면 세금을 내야 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기업들의 FTA 원산지 증명 컨설팅을 해주는 관세사들은 현실상 세관이 완벽한 원산지 관리를 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한다.
한 관세사는 "세관에서 현장실사도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현장실사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인력도 부족하고 일도 많아 세관에서도 원산지 관리를 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며 "서류를 보고 어떤 점을 보완하라고 얘기해주는 것이 전부라서 기업들은 인증받는 정도의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른 관세사는 "그렇다고 세관에다가 무턱대고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위험도(risk) 관리에는 비용이 따르기 마련인데 세관이 제공하는 서비스는 현재 무료이기 때문"이라며 "중소기업을 무료로 지원해준다는 명목으로 이 제도를 운영하다가 자칫 더 큰 세금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 "인식개선·제도보완 같이 이뤄져야" = 관세업계에서는 기업들의 인식개선과 제도보완이 같이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원산지 증명서류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원산지 서류를 발급한 관세사 혹은 세관에게 책임을 따지려면 위험도 관리 비용을 지불해야 하지만 이런 생각을 가진 기업 CEO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특히 원산지 검증의 경우 현재까지 크게 문제된 적이 없어 중요성에 대해 공감을 하지 못하는 업체들이 대부분이다. 관세청에서는 이와 관련해 전국 순회 설명회는 물론 각 세관에서 각종 FTA 교육을 하고 있지만 기업들의 관심도가 떨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관세청도 이런 상황을 인지하고 원산지 확인서 사전확인제도의 보완책을 마련한 뒤 기업들에게 본격적으로 홍보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원산지 검증의 경우 상대국 세관이 우리나라 세관에 검증을 요청하는 '간접검증'과 상대국 세관이 직접 해당 기업을 조사하는 '직접검증'이 있다. 관세청은 간접검증의 경우 세관장이 발급한 확인서의 공신력을 인정해주는 시행령 개정 작업에 착수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기획재정부와 협의해 8월 정도 관련 개정안을 내놓을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직접검증의 경우는 상대국 세관의 소관이라 세관장이 발급한 서류에 대한 책임소재를 시행령에 담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내부적인 판단을 내렸다는 후문이다.
관세업계 관계자는 "현재까지 제도가 시행된지 얼마 되지 않아 세관의 확인서 발급이 문제가 된 적은 없지만 추후에는 이런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며 "현실적으로 세관이 원산지 관리를 하기 어려운만큼 혼자 모든 것을 도맡아하기보다는 관세사를 활용하는 등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