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상 수상자가 13일 경제학상 수상자 발표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한국은 올해도 노벨상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가 ‘역시나’로 끝났다.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돼온 시인 고은(高銀)은 올해도 그 영광이 비껴갔다. 한국인 최초 노벨 화학상 수상자 유력 후보로 거론된 유룡 기초과학연구원(IBS) 단장 겸 카이스트 특훈교수의 화학상 수상도 불발로 끝났다.
일본인 과학자 3명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되면서 일본의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는 19명을 헤아리게 됐다. 일본을 대등한 라이벌로 생각하고, 이제 일본을 이겼다고 자만하는 많은 한국인들에게 ‘19대 0’의 충격과 자조를 안겼다.
노벨상에 목말라하는 한국인들을 약 올리기라도 하듯 올해 문학상 수상자 프랑스의 파트리크 모디아노는 “나는 노벨상 같은 것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스웨덴 한림원이 왜 나를 뽑았는지 그 이유가 매우 궁금하다”고 어깃장을 놓았다.
모디아노는 프랑스에서 ‘이 시대의 마르셀 프루스트’로 불리지만 그의 작품들은 난해하고 문체가 시(詩)적이어서 영어로 번역된 작품은 몇몇에 불과하다. 프랑스가 ‘가장 잘 숨겨놓은 비장(秘藏)의 작가 중 한 사람’을 스웨덴 한림원이 발굴했다는 얘기인가.
노벨문학상이 시작된 1901년부터 지금까지 109명의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문학상 수상자가 나온 나라는 39개국이다. 문학상 수상자를 국적별로 보면 프랑스가 15명으로 가장 많고, 미국 12명, 영국 10명 순이다.
아시아권에서는 일본이 가와바타 야스나리(1968)와 오에 겐자부로(1994) 등 2명을 배출했
고, 인도의 타고르(1913), 이스라엘의 슈무엘 요세프 아그논(1966), 터키의 오르한 파무크(2006), 중국의 모옌(2012)이 각각 수상했다.
고은 시인은 10년 넘게 후보로 거론됐고, 올해는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케냐의 소설가 시인 극작가 엔구기 와 티옹고가 막판까지 경합을 벌인 것으로 보도됐다.
올해 수상자 발표를 앞두고 2012년 중국의 모옌이 수상하면서 고은과 무라카미 하루키 등 아시아권 작가가 2년 만에 또다시 상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 섞인 전망도 나돌았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 지역안배론은 우리에게 위안이 될지는 몰라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1년 전 고은 시인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10월엔 부재(不在)이고 싶다”며 “우리 그것(노벨문학상)에 환장하지 말자!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천박해지지 말자!”고 일갈했다. “사람들이 나를 대할 때 시인 아무개는 어디로 가버리고 ‘그것’과 관련돼서만 바라보는 시선을 느낄 때면 나는 갑절로 외롭다”고 털어놓았다.
한국도 문학적으로 깊이가 있고 성숙하게 되면 노벨상은 절로 오게 될 것이다. 그러기위해서는 한국적인 것을 넘어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들이 많이 나와야하고,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협소한 의미의 민족문학을 포기해야 한다는 자성도 문학계 내부에서 불거진다.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국은 최근 20년간 이스라엘만이 새 수상국에 추가될 정도로 과학선진국 몇몇의 독무대다. 일본이 19명의 수상자를 배출한 것은 그 자체로 충격이다.
수상자의 면면도 도쿄대 교토대 등 명문대 출신에서 갈수록 지방대출신들이 늘어나면서 일본 과학연구가 엘리트위주에서 지방의 산학현장으로 저변이 확대되는 모습이다.
청색 발광다이오드(LED)를 개발해 물리학상을 공동수상한 나카무라 슈지 교수는 “지방에서 태어나 지방대학을 졸업하고, 지방기업에 취직해 내가 하고 싶은 연구에 몰두했더니 노벨상을 받게 되네요”라며 자신이 ‘촌놈’임을 유난히 강조했다. 엄격한 위계질서가 지배하는 일본 과학계 분위기로 보면 나카무라 교수는 이단아에 가깝다.
낙후된 지역인 시코쿠의 에히메현 출신으로 도쿠시마대학을 다닌 그는 1979년에 도쿠시마현에 있는 중소기업 니치아(日亞)화학공업에 취직했다. 이곳에서 그는 청색 발광 다이오드(LED) 제품화에 성공했다.
노벨상수상이 결정된 후 “가장 감사하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그는 회사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연구를 인정하고 투자해 준 니치아 창업자 오가와 노부오(2002년 작고) 전 사장이라고 대답했다.
일개 회사원 출신이 노벨상을 거머쥔 신화는 일본에서는 이제 놀라운 일이 아니다. 2002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다나카 고이치도 지방대를 졸업한 민간기업 회사원에 불과했다. 과학부분 노벨상 100년 역사에서 첫 학사(學士)수상자였다.
나고야대학은 인근에 본사를 둔 도요다와의 산학협력관계로 노벨상 수상자 4명을 배출했고 이번에 공동수상한 아카사키·아마노 교수도 이 산학협력에 따른 집중투자의 소중한 결실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일본인 3명의 물리학상 공동수상에 우리가 크게 주목할 점은 기초과학 연구자와 그 성과를 제품화한 기술자가 동시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인류의 보다 나은 생활에 이바지하는 발명에 상을 준다’는 알프레드 노벨의 염원에도 부합한다.
일본이 2000년 이후 노벨 과학상 분야에서 미국, 영국과 함께 세계 3강(强)을 구축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국가차원에서 과학기술 개발에 매달리며 일찌감치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로 발판을 구축했고, 기초과학기술 개발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에다 해외우수기술 활용을 위한 국제공동 연구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한 우물만 파는 일본 특유의 장인정신에다 산업현장에서의 실용화연구와 산학협력이 뒤를 받치고 있다.
한․일 노벨과학상 ‘19대 0’을 접하며 ‘일본은 하는 데 왜 우리는 못하느냐'’ 자탄도 쏟아진다. 일본수준의 뒷받침만 해주면 10년 내로 유룡 교수처럼 유력한 후보군에 오를 수 있는 과학자들이 수두룩하다. 연구여건부터 마련해주고 수상욕심을 내는 것이 순서라는 과학계의 볼멘소리도 들린다.
노벨상은 욕심만 낸다고, 우리 모두가 ‘환장’한다고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아이 노벨상수상자로 키우기’처럼 무슨 입시 준비하듯 화려하게 스펙을 쌓고, 국가가 드라이브를 건다고 되는 일은 아니다.
일본의 수상자 아카사키 이사무 교수는 “유행하는 연구에 매달리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최고”라고 겸손히 말했다. 이는 만고의 진리다.
너도나도 인기 분야에만 매달리며 연구비를 쪼개 갖는 연구풍토에서 일본식 한 우물파기는 대한민국에서 불가능하다는 한 과학자의 실토가 우리를 더욱 우울하게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