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널 단 한 순간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네가 이렇게 보란 듯이 합격 통지서를 들고 오니 아빠는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받은 것 같구나. 아들아, 이 아빠는 네가 자랑스럽다. 무엇보다 우리 가족을 하나로 묶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한단다.”
몇 날 며칠을 고심했던가. 합격자 발표일이 하루하루 다가올수록 가슴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무엇보다 지난 과오를 잊고 오직 한 길만 보고 노력한 아들이 빛나는 결실을 맺게 되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가족 모두가 초주검이 된 채 결과를 기다리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합격자 발표 날, 아들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커다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빠, 저 합격했어요. 그것도 정시에서 서울대 법대 수석합격이래요.”
아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눈에서도 눈물이 봇물처럼 터졌다. 아내를 쳐다보자 이미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아들을 와락 부둥켜안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인가. 이날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의 순간을 견뎌야 했던가.
“이번이 도대체 몇 번째냐! 자꾸 다음으로 미루기만 한다고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겠느냐. 잠을 줄여가며 공부해도 될까 말까 한 일을, 너처럼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남는 시간에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가겠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이냐? 이 아빠는 네 나이에 직장을 다니면서 공부해 대학에 들어갔다. 당시에는 돈이 없어 먹고 싶은 것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못 자며 공부했다.
그런데 지금 너는 부족한 거 없이 공부만 하면 되는데, 그것도 제대로 못 해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는 것이냐.”
영등포세무서장으로 발령이 난 후, 폭발적으로 늘어난 업무 때문에 차츰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때문에 아이들의 교육 문제도 신경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딸아이는 워낙 성실하고 자기 스스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게 단련이 되어 있어 걱정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이 지나도록 대학에 번번이 낙방하여 당시 내 유일한 고민거리였다.
고등학교 재학시절 전교 10등 안에 늘 이름을 올리던 아이였는데, 모의고사만 봤다 하면 성적이 들쑥날쑥 하는 통에 온 식구의 애간장이 다 녹을 지경이었다. 반복되는 진학 실패로 아들의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들을 마주할 때마다 내 걱정과 고민은 짜증으로 변질되어 아들에게 날카로운 비수로 전해졌으리라.
아무런 의욕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보내는 아들이 못 미더웠다. 그래서 볼 때마다 호통을 치고 매를 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내가 손에 든 종이를 흔들어대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여보, 이것 보세요! 도대체 당신이 평소에 아들에게 어떻게 했기에, 애가 이런 말을 메모지에 적어 놓느냐고요.”
아내 손에 들린 메모지를 빼앗아 읽어보았다. 눈앞이 아찔했다. 잠시 동안 멍한 상태로 천장만 응시했다. 자주 볼 수 없는 아들이었기에 걱정이 앞서 칭찬보다는 질책이 먼저 나왔던 것이다. 그것이 아들에게는 상처가 되었고, 그 상처를 보듬어 주기보다 벌어진 상처를 계속해서 자극해 왔던 것이다.
메모지에는 짤막한 내용이 씌어 있었다.
‘우리 아버지 언제 죽지?’
충격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아내는 옆에서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며 그 메모지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봤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았고, 딱히 이 문제를 해결할 묘책도 떠오르지 않았다. 날마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했지만 먹먹해진 가슴이 쉽사리 뚫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나 모르게 ‘아버지 학교’에 등록을 해 놓았다.
나는 할 수 없이 아내의 제안대로 온누리교회에서 운영하는 ‘아버지 학교’에 입학했다. 사실 혼자서 해결하기에는 벅찬 문제였다.
아들에게 그런 마음이 들게 한 데에는 나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 학교’는 매주 토요일 오후 5시부터 11시까지 총 5주간의 일정으로 진행됐다.
그곳에서 크리스천으로서의 아버지의 권위와 역할, 그리고 남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둘째 주간은 아들로서 돌아가신 내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라고 하고 3주차에는 아버지로서 내 아들에게 쓰는 편지와 함께 ‘아들아! 네가 사랑스런 20가지 이유’를 숙제로 내주었다. 당시 국세청에서 가장 세수 규모가 큰 지역을 관할하는 영등포세무서장 시절이었는데 그 바쁜 결재까지 미루어가면서 끙끙대며 숙제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녀석의 사랑스런 모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아내의 오랜 진통 끝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아들은 천사처럼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첫걸음마를 뗐을 때 온 세상을 얻은 것처럼 환호했고, 서툰 걸음으로 내게 다가와 ‘아빠!’하고 안길 때는 이렇게 귀한 생명을 내게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리고 조막만한 손으로 정성스레 만든 색종이 카네이션을 내 가슴에 달아주었을 때를 떠올리니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대여섯 살 때인가, 얼굴에 구두약을 잔뜩 묻힌 채 침을 탁탁 뱉어가며 구두를 닦아 놓고 손을 내밀며 용돈을 달라던 모습, 휴일에 공원에 나가 함께 야구를 하던 추억들이 떠오르며 벅찬 감격이 온몸을 휘감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들이 사랑스러운 이유를 20가지로만 한정할 수 없었다. 그 아이 존재 자체가 내 삶의 기록이며 내 삶의 이유였다.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기 위해 나는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던가. 세상 모든 유혹이 내 심장을 파고들 때마다, 아들에게 부끄러운 아빠가 되지 않게 해달라고 얼마나 눈물로 기도했던가.
끝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졌지만, 종이에 글자를 한 줄 한 줄 새겨넣을 때마다 짙은 안개가 걷히고 세상 모든 사물이 또렷하게 다가왔다.
아들에게 고백하는 심정으로 종이 한 장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아들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내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말이다.
그렇게 하여 ‘아들아! 네가 사랑스런 20가지 이유’를 써서 아버지 학교에 제출했다. 며칠 후 퇴근해서 집에 가니 그 아들이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아내에게 “쟤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했더니 아내는 이상한 편지를 받더니 그런다고 했다. 아버지학교에서 내가 아들에게 쓴 편지와 함께 ‘네가 사랑스런 20가지 이유’를 코팅해서 아들에게 보낸 것이었다. 그때가 대학수능을 3개월 정도 남겨둔 시점이었다.
다음날 아침 출근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아들이 눈이 퉁퉁 부은 채로 “아빠!”하며 나에게 안겼다. 내가 쓴 편지와 아들이 사랑스런 20가지 이유를 통해 아들이 아빠의 사랑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3개월 후, 아들의 대입수능고사가 있던 날 아침이었다.
아들은 그동안 절치부심 노력하여 석 달 동안 모의고사 성적을 크게 향상시켰다. 아내는 새벽부터 도시락을 싸느라 분주했고, 나는 가슴을 졸이며 아들의 표정을 살폈다.
마침내 아들의 방문이 열리고 결전의 준비를 모두 마친 아들이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걸어나왔다. 얼굴에는 그 어떤 긴장도 비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감이 넘치는 평화롭고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런 아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더 이상의 실패는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들의 입에서는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아빠, 그동안 심려를 끼쳐 죄송해요.”
아들의 그 한 마디가 유언처럼 들렸다. 삼수까지 하면서 온갖 고초를 겪었을 아들의 참담한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2001년 3월, 아들 성제가 서울대 입학식에서 신입생을 대표하여 선서할 때
집을 나서는 아들의 등을 바라보는 그 심정을 누가 알까. 마치 아들을 전장에 내보내는 아비의 심정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곧 출근을 했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들의 마지막 그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부하직원이 결재 서류를 책상에 올려놔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퇴근 시간이 지나자마자 곧장 집으로 갔다. 그러나 아들의 소식이 없었다. 불안했다. 밤 10시경이 되어서야 아들이 나타났다.
“시험은······ 시험은 잘 봤어?”
최대한 조심스럽게, 혹시 아들의 아픈 속을 건드리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며 물었다.
“하나 틀렸어요.”
아들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가득했다. 그 웃음 하나로 얼어붙어 있던 나의 마음도 봄눈 녹듯이 녹아들었다.
“수험표 뒤에 적어 온 답을 맞춰보니 딱 한 개 틀렸더라고요.”
의기양양하게 수험표를 흔들며 대답했다. 그러나 가채점이 정확하게 반영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불안해하지는 말되,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당부하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런 걱정은 나만의 기우였다. 아들은 정확히 2점짜리 문제 하나만 틀려 400점 만점 중 398점을 얻는 기적을 일으켰다. 물론, 이 결과를 기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랜 시간 피와 땀으로 노력한 결과이며, 매일 눈물로 기도한 나와 아내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아들은 그토록 원하던 서울대학교 법대에 지원을 했고,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논술고사와 면접에서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아내며 종합점수로 수석을 차지했다.
지금은 결혼을 해서 내 곁을 떠난 아들이지만 아직도 학업을 진행하고 있는 그를 보면서 나는 느끼고 있다. 이 아들은 내 아들, 내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그러나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비가 온 뒤의 땅이 굳어지는 법이다. 그동안의 아들과 나의 갈등은 둘 사이를 부자(父子) 이상의 것으로 끌어올렸다.
아들과의 갈등을 통해 다시금 옛 추억을 떠올리며 내가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깨달았다. 이 지면을 빌어 아직도 학업 연마에 매달리고 있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고백한다.
“사랑하는 아들 성제야, 아빠는 너의 가능성과 비전을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다. 한때 그 기대가 너무 커서 너를 구석으로 모는 과오를 범했지만, 너와 나는 하나님의 보살핌으로 그전보다 더욱 사이가 좋은 아버지와 아들이 되었잖니? 이제 이 아빠는 네가 세상 어디까지 지평을 넓혀 나갈지 지켜볼게. 그 과정에서 넘어지고, 시련을 겪고, 좌절하더라도 오직 굳건한 믿음으로 후원해 줄게.
나 역시 너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기 위해 뛰어왔던 것처럼, 너 역시 먼 훗날 태어날 너의 아이에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기 위해 노력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우리를 늘 보살펴주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부끄럽지 않은 신실한 믿음의 일꾼이 되자꾸나.
언제 한 번 예전처럼 공원에 나가 야구도 하고, 도시락도 먹으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으면 한다. 지금 당장은 무리겠지만, 그런 기다림이라면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그날을 기대할 수 있을 듯싶다. 사랑한다. 내 아들 조성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