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계 거물들의 비자금 뒤엔 어김없이 자리하고 있는 차명계좌.
'반쪽짜리' 금융실명법으로 인해 오랜 기간 동안 검은자금을 조성하거나 재산을 숨기고, '세금회피'를 위해 사돈에 팔촌 이름까지 동원된 차명계좌가 '탈법'의 도구로 활용되어 왔다. 과세당국에서도 탈세목적으로 개설된 차명계좌를 찾으려 애쓰고 있지만 이를 찾아내기는 녹록치 않다.
추적에 들어가기 전 까지는 어디서 나온 자금인지 알아내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추적에 성공한다 해도 차명계좌를 통해 해외로 나간 자금은 아예 '오리무중(五里霧中)'이 되기 십상이다.
차명계좌가 여러 규제에도 불구하고 성행하는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현행 금융실명제법이 '실명이 아닌 거래'만을 규제 대상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합의에 의한 차명거래일 경우 규제 수단이 현재는 전무하다.
금융실명법 시행 직후부터 차명거래 규제의 실효성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됐고 결국 지난 5월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해 지난달 29일부터 대폭 강화된 '차명거래금지법'이 시행에 들어갔다.
개정안은 재산은닉과 자금세탁 등의 목적으로 차명계좌를 개설하는 것을 전면 금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차명계좌 개설 시 실소유자는 물론 계좌를 빌려준 명의자 모두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 '방패' 잃은 부유층…'무기' 쥔 국세청 = 이번 금융실명법 개정으로 인해 고액자산가들이 거액의 예금을 인출하는 등 혼돈 속에 파묻혔다. 최근 5개월 사이 은행의 1인당 1억원 이상 고액 예금이 대량 인출됐다.
인출된 금액은 총 485조원. 금융실명법 개정안이 공포된 직후부터 나타난 현상이다.
역외탈세나 편법증여 등에 단골로 등장하는 차명계좌의 존재를 알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과세당국에게 이번 개정안은 탈세혐의자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좋은 무기가 될 전망이다.
그동안 국세청은 편법·변칙증여나 역외탈세, 재산은닉 등에 차명계좌가 사용된 정황을 포착하면서도 법적 근거가 없어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고 이 문제는 지난 2010년 국정감사에서 수면 위로 드러났다.
국세청은 지난 2010년 3월 자금출처 조기검증프로그램으로 변칙증여상속 재산 2075억원을 적발했고 이 중 차명계좌로 의심되는 1444억원도 발견했다. 미성년자 명의로 된 차명계좌는 349억원으로 편법증여 정황이 뚜렷했다. 하지만 당시 법적 근거가 없어 과세하지 못했다.
지난 2012년 상속·증여세법이 개정되면서 차명계좌에 대한 국세청의 칼날도 어느 정도 힘을 발휘하게 됐다.
과거에는 증여 발생 시점을 '차명 자산의 명의자가 자금을 인출해 사용한 경우'로 봤지만 개정안은 '차명 자산을 보유하는 시점'에 증여가 발생한 것으로 명문화했다.
즉 차명계좌의 자금을 인출하지 않는다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법이 개정되면서 차명계좌를 만드는 순간 증여로 간주되는 것이다. 증여세를 납부하지 않으려면 본인이 증여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입증책임까지 부여했다.
정부는 지난해에도 상증세법을 개정해 '차명계좌 증여추정 조항'을 신설, 명의자가 실제 증여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적극 입증하지 못하면 증여세가 과세되도록 법망을 더욱 촘촘하게 만들었다.
지난해 11월부터 금융정보분석원(FIU)의 2000만원 이상의 고액현금거래(CTR) 자료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도 국세청에게 큰 힘이 됐다.
국세청은 2012년부터 차명계좌 신고포상금 제도도 운영(1건당 포상금 50만원)을 시작했다. 지난해 국세청에 신고된 차명계좌 건수는 147건, 포상금 지급액은 1억850만원이었다.
아울러 지난해 국세청은 지하경제 양성화의 일환으로 숨긴재산무한추적팀을 대폭 강화해 차명계좌를 면밀히 살펴보고 고소득 자영업자의 탈세를 단속하는데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에 금융실명법 개정안까지 더해지면서 차명계좌 보유자에 대한 국세청의 탈세행위 차단은 더욱 수월해질 것으로 보인다.
□ "절세 전략 변화할 때…"합법 증여가 이득" = 이번 차명계좌금지법에서 금지하는 금융거래는 불법재산 은닉, 자금세탁행위, 기타 탈법행위를 위한 거래다.
동창회 등 친목모임 회비 관리를 위해 대표자 명의로 계좌를 개설한다든지 문중 등 임의단체 금융자산 관리를 위한 대표자 명의 계좌 개설 행위는 차명거래일지라도 차명거래금지법 위반에 해당되지 않는다.
하지만 차명계좌를 통해 과세를 피하거나 낮은 세율을 적용받는 것은 탈법 목적 금융거래에 해당된다. 현재 상증세법은 차명계좌 명의자가 증여를 위한 차명계좌라고 아니라고 입증한다면 증여세가 과세되지 않지만 이번 금융실명법 시행에 따라 증여를 위해 차명계좌를 개설했다고 입증만 된다면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이라는 형사처벌을 면할 수 없게 된다.
자산가들이 그동안 과다한 증여세를 피하기 위한 절세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차명계좌를 조세포탈행위로 보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합법적인 방법을 통한 자산관리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가장 쉽게 증여를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세법이 인정한 범위에서의 증여공제 활용을 꼽고 있다. 10년간 배우자 6억원, 성년 자녀 5000만원, 미성년 자녀 2000만원 까지 세금 없이 이전할 수 있는 규정을 이용하라는 조언이다.
하지만 기존의 차명계좌는 명의를 환원해야 하는 문제가 남는다.
차명계좌를 환원하는 경우 과거 발생한 금융소득 미신고 문제 등을 포함해 조세 및 형사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이와 더불어 올해 세법개정으로 큰폭으로 혜택의 규모가 확대될 가업상속공제 제도를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아직 국회에서 논의가 한창이지만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가업상속공제 대상이 현행 매출액 3000억원 미만에서 5000억원 미만으로 확대 적용되는 등 요건이 대폭 완화된다.
홍기용 인천대 교수는 "개정된 가업상속공제규정이 국회를 통과하면 자산가들이 대부분 이 제도를 이용할 것으로 생각한다"며 "합법적인 길이 많아지고 있는데 굳이 불안하게 차명계좌를 사용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체계적으로 준비만 하면 세금 없이 증여하는 길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 돈, 더 깊은 지하로?…해결방안은 상증세 완화 = 지하경제 양성화에 사활을 걸고 있는 박근혜 정부에서 차명계좌에 대한 대수술은 필수불가결한 선택일 수도 있다. 차명계좌는 그동안 비자금 조성, 탈세 등 지하경제의 온상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지난해 FIU법 개정을 통해 FIU가 보유한 의심거래(STR)와 2000만원 이상의 고액 현금거래(CTR)를 과세관청이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것과 차명계좌신고포상금제도가 신설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성과도 확연하다.
국세청은 올해 7월까지 6만2921건의 정보를 제공받아 2만9814건을 처리했다. 이 중 57.7%, 1만7200건에 대해 고발 또는 추징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관세청은 1만3301건의 정보를 제공받아 6672건을 처리하면서 41.2%에 해당하는 2749건에 대해 고발·추징하는 성과를 올렸다.
여기에 이번 차명계좌금지법까지 시행되면 그야말로 차명계좌를 통한 불법행위는 설 곳이 없어진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하지만 입법 취지와는 달리 규제가 강화되면 자산가들의 자금이 지하경제로 더욱 깊숙이 숨어버릴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제기되고 있다.
이미 차명계좌를 통한 세금 회피가 어려워질 것을 예상한 자산가들이 보험·펀드 등 비과세 상품이나 금 현물거래 등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시중 은행에서는 '5만원권 품귀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다.
차명거래 금지가 기존 차명계좌를 해지하고 아예 현금으로 보유하려는 수요를 자극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좀 더 근본적인 논의가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불법적인 증여를 막기 위해 차명계좌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상속·증여세의 부담을 완화해야한다는 주장이다.
상속세율 인하의 필요성은 매년 세법개정안 논의 때마다 단골 메뉴로 등장하지만, 한 차례도 인하한 적이 없다.
현행 상속세율은 피상속인의 상속재산액에 따라 최대 50%까지 세율을 적용하고 있다. OECD 국가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높게 과세하고 있다는 근거에 따라 세법개정안 작업 절차에 있어 매년 검토되고 있는 사안이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조세재정연구원도 한국의 상속·증여세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26%)보다 2배 가까이 높다며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려면 최고세율이 50%인 상속·증여세율을 중장기적으로 소득세율(최대 38%) 이하로 낮춰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조세전문가는 "차명계좌금지법에 대한 취지나 방향은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몇가지 보완이 뒤따라야 한다"며 "외국에 비해 현저히 높은 상속세율을 인하해 합법적인 상속을 유도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문제"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