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즉, 납세자들은 '증세'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당장의 자기 호주머니 사정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른 세법개정도 중요하지만 정부와 정치권은 특히 증세와 관련한 세법개정에 좀 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지난해 정부 세법개정안이 '중산층 호주머니를 턴다'는 반발에 부딪혀 수 일만에 대폭 수정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은 것도 증세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세율을 올리거나 세목을 신설하는 증세는 아니지만 올해 세법개정안 역시 곳곳에 '사실상 증세'라 부를 수 있는 법안이 숨어있었다.
법을 통과시키는 수문장 역할을 맞고 있는 국회라면 이같이 국민의 호주머니와 직결되는 증세성 법안과 관련해서는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 하는 것이 온당한 일.
하지만 사실상 비공개로 진행되는 '밀실' 조세소위에서, 단 2주 만에 230여개 법안이 심의되는 이른바 '졸속국회'에서 충분한 논의는 먼 나라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는 상황이다.
□ 국민 안중에 없는 '무대포' 증세 = 올해 정부 세법개정안의 핵심인 가계소득 증대세제 3대패키지는 제대로 된 논의도 생략된 채 정부안대로 모두 통과됐다.
이 가운데 당기소득의 60~80%를 투자와 임금, 배당 등으로 늘리지 않으면 미달액의 10%를 과세하는 기업소득환류세제, 일명 '사내유보금 과세 제도'는 정부의 '세수제로 설계' 주장에도 불구, 사실상 기업들에 대한 증세제도라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재계 관계자들은 지난 8월 사내유보금 과제 제도가 발표될 당시부터 줄기차게 문제점을 지적하며 국회 논의과정에서 적합한 수정안이 제출되기를 기대했지만 결국 여야 의원들은 정부원안을 통과시키는 것에 합의했다.
파생금융상품에 양도소득세를 부과하는 법안도 통과됐다. 장외주식 차익에 양도소득세가 부과되는 것처럼 파생금융상품의 매매차익에도 양도소득세(20%)를 부과하되, 탄력세 10%를 적용해 오는 2016년부터 10%를 부과한다는 것이 골자다.
당초 정부는 파생상품에 0.01%의 거래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매매가 잦은 파생상품 시장 특성상 부담이 크다는 이유로 양도소득세 부과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거래세 부과만큼은 아니겠지만 과세가 이루어질 경우 개인투자자들이 시장에서 대거 이탈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는 상황이다.
말 많고 탈 많았던 담뱃세에도 결국 개별소비세가 추가된다. 담뱃값을 한꺼번에 2000원 인상하기 위한 개별소비세 신설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개별소비세는 담배 물품가격의 77%로 신설될 예정이다.
개정안 통과에 따라 담뱃값 인상 2000원 중 584원이 지방세가 아닌 국세인 개별소비세로 들어가는 것. 당초 정부는 개별소비세에 대해 담배 출고가격이나 수입가격에 연동하는 종가세 방식을 추진했었으나 한 갑당 일정액을 부과하는 '종량세'로 신설됐다.
세금우대종합저축과 생계형 저축은 비과세종합저축으로 통합됐다. 비과세종합저축은 고령자와 장애인, 독립유공자에게 기존 3000만원 한도를 5000만원 한도까지 비과세 혜택을 준다는 것이 골자.
다만 연령의 경우 현행 60세이던 것을 2019년까지 단계적으로 1세씩 상향조정해 최종 65세 이상인 자로 한정하고, 20세 이상 일반가입자에 대한 혜택은 폐지돼 사실상 세부담이 높아졌다.
아울러 양당 원내대표 간 합의에 따라 대기업 연구·개발(R&D) 당기분 세액공제율은 현행 4%에서 3%로 인하됐고, 대기업에 대한 고용창출투자세액공제의 기본공제는 폐지돼 사실상 증세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 졸속심의, 책임은 누가? = 문제는 이 같은 증세성 법안들이 충분한 논의 과정을 거쳐 국회를 통과했느냐는 점이다.
지난 8월 정부 세법개정안이 발표된 이후 곳곳에서 3대패키지 등 쟁점사안과 관련한 굵직한 토론회가 열리고 각종 문제점들이 쏟아졌으나, 국회선진화법에 따라 시간에 쫓겼다는 이유로 수많은 정부 원안이 털끝하나 수정되지 않고 그대로 국회를 통과됐다.
여론 수렴을 위한 공청회는 열지 못할망정 들려오는 목소리에도 귀를 닫고 정치를 선택한 국회의 태도에 우려의 목소리가 증폭되고 있는 상황이다.
논의와 여론수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법이 집행될 경우 불러올 파장은 해외사례에서 찾을 수 있다. 잘못된 세법개정은 때론 정권을 위협하기도 했다.
1988년부터 영국에서 벌어진 대처 정권의 '인두세 사태'가 바로 그것이다.
인두세는 지방세의 일종으로 이전에는 사람의 소득이나 재산에 따라서 차등적으로 거두던 세금을, 일괄적으로 모든 어른에게 동일 금액으로 거두기로 한 세목이다. 재산이나 소득과 전혀 관계없이 그 가족의 어른의 수에 따라서 세금을 거둬들이는 인두세는 그렇잖아도 심각하던 빈부 격차 문제를 더 악화시킬 것이 분명해 보였다.
대부분의 시민들과 노조들은 인두세 정책이 발표된 직후부터 "너무 불공평하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부담이 너무 크다"며 강하게 반발했지만 대처 정부는 이를 귀담아 듣지 않고 제도 시행을 강행했다.
높은 인플레이션과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 격차를 꾹꾹 참아온 영국 국민들은 결국 1990년 3월31일 트래펄가광장으로 모였다. 같은 날, 스코틀랜드의 글라스고우에서도 5만명의 시민이 행진을 시작했다. 당초 6만명의 시민들이 모일 것을 예상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참가자가 늘어 무려 20만명이 집회에 모였다.
하지만 이 같은 저항에도 대처 정부는 반성은 커녕 다음날 오히려 시위대들을 폭도로 몰아갔고, 결국 국민들은 대처 정부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인두세 납부 거부 운동을 벌이면서 조직적으로 저항했고, 결국 '철의 여인' 대처 총리는 그해 11월20일에 실시된 보수당 전당대회에서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반대로 여론수렴이 잘된 케이스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 집권 12년(1430년) 조선은 세금 부과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호조 관리가 논밭을 확인하고 세금을 거두는 방식을 개선, 전답 1결마다 10두를 거두는 '공법'이라는 토지세법에 대한 평가를 백성의 선택에 맡긴 것.
5개월 동안 17만명이 참여한 조선 최초의 국민투표로 세종은 공법을 추진하면서 여론조사(찬성 9만8000명, 반대 7만4000명)를 실시해 법제정 여부를 가늠했다. 이후에도 세종은 수차례 개정과정을 거쳤고 시범실시에 토론을 거쳐 무려 13년만에 세법개정을 공포·시행했다.
13년이란 수치를 지금의 상황과 단순 비교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지만 제왕의 권위가 곧 하늘이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 신중한 논의 과정을 거쳐 세법을 개정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이는 없어 보인다.
인천대 홍기용 교수는 "현행 세법심의제도는 문제가 많다"고 운을 뗀 뒤 "특히 세입과 관련된 부분은 국민에게 어떻게 세부담을 지우냐에 대한 문제인데 공청회도 열지 않고 유관기관의 의견서도 제대로 받지 않고 있다. 입법절차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기획취재팀 : 이희정, 이현재, 강상엽, 류성철, 우선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