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빌게이츠도 주목할 만한 기업으로 인정할 만큼 '위장술'에 능했던 모뉴엘의 실체적 진실을 파헤친 한 관세공무원이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2014년 올해의 관세인'에 선정된 서울세관 특수조사과 이정희 관세행정관(사진)이 그 주인공이다.
26년의 공직생활 중 16년을 조사업무에 매진하고 있는 이 행정관은 지난해 최고의 한해를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인 스스로도 26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최근 '모뉴엘 사태'를 꼽을 만큼 2014년은 이 행정관에게 특별한 해였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소유자지만 조사업무에 있어서는 끈질기게 의구심을 제기하고 무서울 정도로 사건에 몰입하는 이 행정관.
그는 8일 조세일보(www.joseilbo.com)와의 인터뷰에서 "교묘한 방법으로 탈세를 하거나 재산을 국외로 빼돌린 자들을 단속함으로써 잘못된 부분을 올바르게 바로잡아가는 것이 사명이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임하고 있다"고 밝혔다.
□ "힘들지만 자랑스러운 관세공무원" = 국립세무대학을 졸업한 이 행정관은 1989년 군산세관에 임용된 후 인천, 김포, 서울세관 및 관세청에서 통관, 심사, 조사분야 업무를 담당했으며, 현재는 서울세관 특수조사과에서 조사분야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1998년부터 무려 16년간 조사업무에 임하고 있으며, 2007년부터는 선임조사전문관으로서 조사기법 연구, 직원들의 조사능력 배양을 위한 강의도 겸하고 있다.
그의 주요 일과는 외환전산망을 통해 한국은행으로부터 제공받은 각종 외환거래자료 및 신고자료를 모니터링하고 물류흐름과 외환거래의 흐름이 부합하는지 여부를 체크하는 것.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짐에 따라 눈에 피로가 가중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행정관의 설명이다.
이 행정관은 "최근 눈이 부쩍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느껴 최대한 녹색환경을 많이 접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물론 힘든 점도 있지만 관세청에 입사해 통관업무, 공항만 감시업무, 심사업무를 담당하면서 관세공무원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생활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특수3팀에 대해 "일부 기업들의 불법 해외 국부유출에 대응하기 위해 전국세관의 최고 외환조사 전문 요원들로 구성돼 있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운 뒤 "그동안 경험한 사건들을 바탕으로 후배들이 재미있고 신명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조성을 위해 노력하는 선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 "관세청 사상 최대사건 주인공 될 수도" …'모뉴엘 사태' 전말 = 이 행정관은 지난해 '모뉴엘이 홍콩과의 거래를 통해 자금을 국내로 불법 반입하고 있다'는 다소 모호한 제보를 접하게 됐다. 대한민국을 들었다 놨다 한 '모뉴엘 사태'의 시발점이었다.
즉각 사실 확인에 나선 그는 모뉴엘의 외환거래자료와 통관자료를 정밀분석한 결과 수조원대의 외환거래 내역에 비해 국내 통관량이 너무도 적은 것을 확인, 해외거래를 통해 가공의 매출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갖게 됐다.
하지만 실제 모뉴엘의 국내 가공공장에 방문해 거래한 물품을 확인한 결과 모뉴엘의 제품들은 고급케이스에 부속품들을 장착해 외관상으로 그럴듯해 보였다는 것이 그의 설명.
이 행정관은 "당시 '원하는 부품들을 추가로 조립해 사용할 수 있는 반제품(BAREBONE)형태의 마니아들을 위한 고급제품'이라는 직원의 설명에 이상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잠시 품었다"고 밝혔다. 다음날 사전 연락 없이 가공공장을 방문했을 때도 하청공장의 현장 직원이 너무도 태연하게 똑같은 설명을 해 정상적인 거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더해 갔다.
하지만 ▲회계자료상 매출에 비해 턱없이 적은 현금흐름과 한정된 거래처 ▲수백억원대의 무역거래 계약서가 고작 한두 장으로 처리돼 있는 점 ▲직원들과의 면담을 통한 불명확한 거래과정 및 회사 주요 매출물품이 로봇청소기로 알고 있다는 점 ▲몇 년에 걸쳐 동일한 모델을 고정된 가격으로 거래하고 있는 점 등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는 요소가 너무도 많았다.
결국 그는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했고 특수조사과 직원 모두와 타부서의 일부 직원 등 20명이 넘는 직원이 투입돼 압수한 트럭 2대분에 대한 자료를 분석했다.
분석과정에서 하나하나 드러나는 사건의 전모에 팀원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는 이 행정관.
그는 "팀원들이 사건파악에 몰입해 자정을 넘기는 것은 예삿일이고 주말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해 자료를 검토했다. 매출 1조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실적을 자랑하는 회사의 불법행위에 대해 실체적 진실을 밝혀 우리 팀이 관세청 사상 최대사건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자부심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업무에 임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조사결과 8000원~2만원으로 조사된 홈시어터 케이스는 무려 250만원 상당으로 가격이 부풀려져 있었고, 심지어 물품의 이동 없이 서류상으로만 거래를 꾸며서 국내은행으로부터 3조2000억원 상당을 불법으로 대출 받은 사실도 파악했다.
또한 수입대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자금을 해외송금하고 수출대금 명목으로 수령해 되갚는 수법으로 대출금을 상환하는 과정에서 국내은행에 6745억원을 갚지 않아 손실을 초래한 사실을 확인하고 범죄과정에서 해외에 535억원 상당을 빼돌려 도박, 호화주택 구입 등으로 소비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외에 불법해외예금거래 2조8000억원, 자금세탁 120억원, 허위 수출입신고 1300여건(1조2000억원) 등의 범죄를 저지른 사실도 조사를 통해 만천하에 공개됐다.
이 행정관은 모뉴엘 사태에 대해 "은행으로부터 자금을 대출받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들여가면서 세계가전전시회에 참여하고 은행 및 회계사무소 직원들을 속이기 위해 해외에 위장가공공장을 설립, 무려 4만여대의 물품을 마련한 사건"이라고 평했다.
그는 이어 "치밀한 준비를 한 마치 범죄집단과 같은 회사를 적발함으로써 아무리 치밀하게 준비를 하더라도 반드시 적발된다는 경각심을 심어준 사건"이라고 밝혔다.
□ "후배양성 통해 관세청 조사조직 기초 마련할 것" = 이 행정관은 퇴근 후에도 조사업무에 대해 고민하는 '천생 관세맨'이다.
그는 "조사업무가 직장에서만 일하고 퇴근 후 멀어지는 것이 아니고 집에 있으면서도 항상 어떻게 접근해 사건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업무이다 보니 그런 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조사업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이 필요한데 서울세관 축구동호회에서 매일 아침 1시간 정도씩을 흠뻑 땀이 나도록 뛰는 것으로 심신을 단련하고 있다. 축구를 통해 운동장에서 몸을 부딪혀가면서 직원들과 유대관계를 넓히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행정관에게는 사랑스러운 아내와 아들, 딸이 있다. 좋은 직장인으로 평가받을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남편과 좋은 아빠는 되지 못할 것이 자명하다는 이 행정관.
그는 "직장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들이 고등학생으로 공부에 힘들다는 이유를 들어 함께 보내는 시간을 많이 갖지 못했다. 집에서 아내의 이야기에 맞장구쳐주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곁들여 소개해주어야 하는데 요즘 아내로부터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말했다.
이어 "아이들도 퇴근하면 인사만하고 각자 자기 일에만 몰두해 대화의 시간을 갖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자주 대화하고 고민상담도 해주는 가장이 되고 싶다"며 "오늘은 퇴근해 아이들의 시간을 조금 빼앗아 하루의 일과도 물어보고 아내에게 우스운 이야기도 하나 해주고 싶다"고 전했다.
관세청에 입사한 지 26년, 그 중에서 조사업무를 담당한지 16년. 이 행정관은 조사업무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에겐 조사업무가 비선호부서로 인식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는 "처음 조사업무를 시작할 때에만 하더라도 직장 내 선호부서로 인기가 많았는데, 요즘에는 개인 여가 시간의 부족 및 팀의 일원으로서의 단체행동 등으로 인해 조사에 근무하려는 후배 직원들이 많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물론 어려운 사건을 한 건 더 해결하는 것도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함께 일할 수 있는 후배들을 양성해 관세청 조사조직이 계속 좋은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는 일이라 생각된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