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정부의 '증세 없는 복지'가 마침내 기로에 섰다. 무상보육·무상급식 등 복지수요를 다 충당하려면 현재 세금 체계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목소리가 여당 지도부에서 거침없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증세 발언은 여권에서 금기시돼왔다. '증세 없는 복지'는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자 국정기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누리당 정책위원회 수석부의장인 나성린 의원은 "박근혜식 증세가 한계에 다다랐다"며 '증세 논의'에 불을 지폈다.
박근혜정부가 출범할 때 탈세 등 걷을 수 있는 세금은 다 걷어보고자 했는데, 저성장 기조 하에서 이것만 가지고 복지재원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진단이다. 따라서 복지수준을 낮추든지 본격적인 증세를 하든지 '국민대타협'을 논의할 때가 됐다는 것이다.
증세에 반대해오던 여당의 대표적 '조세통'이 입장을 바꿔 증세논의를 들고 나왔다는 점은 충격이다. 새 원내대표가 된 유승민 의원은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며 "복지를 더 하려면 증세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국민에게 솔직히 말씀드리고 국민의 선택이 무엇인지 국정에 반영해야한다"고 정부를 다그쳤다.
무상복지 축소나 증세는 둘 다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새누리당 내부에서도 '선별적 복지론'과 '증세 불가피론'이 팽팽하고, 김무성 대표는 "증세를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인식하는 것은 무감각하고 무책임한 일"이라며 일단 제동을 거는 분위기다. 증세를 언급하기 전에 지방과 중앙정부 예산이 비효율적으로 집행되거나 누수 현상이 나타나는 부분은 없는지 꼼꼼히 살피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세금을 더 걷지 않고도 복지재원 조달이 가능하다며 '지하경제 양성화'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5년간 27조원을 거둬들이겠다며 집권 첫 해 대규모 세무조사로 지하경제를 파고들었다. 3조2000억원을 거둬들였다지만 세무조사가 경기를 더욱 위축시킨다는 비난이 쏟아지면서 지하경제 양성화공약은 구호에 그치고 말았다.
지하경제라고하면 밀수, 마약, 도박 같은 것을 떠올리지만 자기 소득을 100% 다 신고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지하경제다. 자영업자 10명 가운데 4명은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는다고 한다. 현금으로 거래하고 소득은 줄여 신고하는 것이 관행처럼 돼 있다.
음식점이나 학원, 심지어 변호사 의사 회계사들 가운데도 소득이 100만원도 안된다고 신고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간헐적인 세무조사 같은 단속행정만으로 지하경제를 양성화하는 것은 스스로 한계가 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고통 없이 거위 털을 뽑는다'는 세제개편이었다. '증세 없는 복지'라는 기조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증세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증세를 하다 국민들의 공분을 산 것이 바로 '연말정산 대란'이다.
공제방식만 조용히 바꾼 것이라고는 하지만 국민들로서는 주머니에서 세금이 더 나가면 증세다. 연말정산에서 환급해주던 항목을 줄인 것이나 담뱃값을 인상한 것이나 모두 증세로 간주된다.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80%가 정부가 지금 증세를 하고 있다고 응답할 정도다. 고령화와 양극화로 재정지출 수요가 날로 늘어나는 현실에서 '증세 없는 복지'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공감대는 확산되고 있다.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도 국민의 65%가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고 쉽사리 증세로 다가가는 것은 정말 무책임하다. 복지수준과 이를 뒷받침할 국민 부담을 함께 놓고 다시 저울질을 해보야 한다. 증세에 앞서 복지수준과 원칙을 먼저 재점검하고 이 원칙에 맞게 복지 지출이 이루어지고, 복지 전달체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도 확인해야한다.
세출구조도 근본적으로 점검해 절약할 것은 최대한 절약하고 경우에 따라 수익자부담원칙으로 각종 공공요금이나 가격을 현실화할 필요도 있다. 그러고 나서도 모자라는 경우 최후수단으로 증세가 논의되어야한다.
복지 프로그램은 설계가 관건이다. 무상이라는 이름 아래 보편적 복지 재정이 늘어날수록 나라의 살림은 어려워진다. 생산적 복지 운운하지만 복지는 본질적으로 소비적인 것이다.
지하철 무료 승차에서 무상급식, 무상보육, 기초연금 확대 등 무상복지 정책에 들어가는 중앙정부·지방자치단체의 예산이 40조 원을 넘는다. 고등학교 무상교육 등 아직 이행하지 못한 박근혜 대통령의 복지 확대 공약들도 남아 있다.
복지정책의 최종 목표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복지 대상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라면 무상 복지라는 이름 아래 현재 시행되고 있는 보편적 복지는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다.
집에서 굶는 아이들이 있는데 부잣집 아이들에게까지 공짜 점심을 주고, 자녀 때문에 직장을 포기하려는 워킹 맘과 똑같은 보육 지원을 전업주부에게도 해주고, 매년 연금과 이자소득 수천만 원을 챙기는 퇴직자가 직장에 다니는 아들의 피부양자로 등록돼 건강보험료를 한 푼도 안 내는 현실은 시정되어야 한다. 증세에 앞서 복지구조조정이 필요한 이유다.
여권내부에서 '중복지 중부담'을 표방하며 이를 논의하기위한 국민대타협기구를 발족시키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금기처럼 통하던 '법인세 인상' 가능성도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있다.
물론 복지 구조조정만으로 고령화에 따른 복지 지출증가에 대처할 수는 없고, 적정한 세 부담 증가는 불가피해 보인다. 현 세대가 부담하느냐 미래 세대의 부담으로 미루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세금은 더 거두려할 것이 아니라 더 걷히게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세제가 공평하고 정의롭다면 꼭 필요한 복지를 위한 증세를 납세자들이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권고대로 간접세 비중을 높이고 금융소득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고, 부가가치세의 간이과세제도를 폐지하거나 대폭 축소하는 등 세제 개편도 필요하다.
신고율이나 표준율에 의한 과세 보다는 기장에 의한 신고를 기본으로 삼고, 세무조사도 공무원 재량이 아닌 법규에 근거해 투명하게 실시돼야 납세자들이 승복한다. 세금이 줄줄 새고, 성실한 납세자가 오히려 손해를 보는 상황에서 누가 정직하게 세금을 내려하겠는가.
연말정산 파동에 놀라 건보개혁을 미룬 건 졸렬한 행동이었다. 박근혜 정부는 지금이라도 '증세 없는 복지'가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적극 국민에게 설명하고 현행 복지체계를 지속가능한 수준으로 재설계해 사회적 대타협을 이루어내야 한다.
증세논의는 다음 단계다. 아무런 선거가 없는 올해는 경제 살리기 뿐 만 아니고 복지구조조정에도 골든타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