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길진 칼럼 - 낙관없는 오세창의 글씨
지인이 오래전 학교에 있을 때 오세창의 글씨 한 점을 얻은 적이 있다고 했다. 대학가를 돌며 고서를 구해주거나 소개하던 노인이 있었다. 서울대가 관악으로 이전하면서 연로한 자기는 더 이상 그 먼데까지 따라가지 못함을 섭섭하다며, 그간의 정표로 지인에게 오세창의 글씨 한 점을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허름한 두루마리 글씨를 그냥 갖고 있기 뭐해서 표구를 맡겼는데 표구된 글씨의 낙관 인(印)이 없어졌다. 지인의 기억에는 분명 낙관 인이 있었는데 맡기기 전에 사진을 찍어놓은 것도 아닌데다 표구상도 친구의 소개인지라 그냥 그 편액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고 서예를 하는 친구들에게 지나가는 말로 오세창의 글씨 얘기를 했더니 표구과정에서 가끔 낙관 인을 떼어가는 일이 있다는 것. 한지는 한 장으로 만든 것이 아니기에 낙관 인을 떼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니 왠지 허전한 기분이 들고 같은 글씨도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단다.
위창 오세창은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에 뛰어난 서예의 대가로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로 하여금 10만석 전 재산으로 서화, 골동품 등과 같은 문화재와 바꾸도록 한 것은 유명한 얘기다.
민족지도자의 한 분이기도 한 오세창 선생은 전형필에게“인간과 동물이 가장 두드러지게 구분해 주는 것은 바로 문화이네. 한 나라의 문화재란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주체성과 정신적 가치가 깃든 일종의 유산이지. 즉 우리 문화재는 우리 민족의 정신이 함축된 유산이란 말일세.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일은 그 일에 생애를 바치겠다는 굳건한 뜻이 있어야만 가능하네.”
이 말에 자극받은 간송은 오세창 선생에게서 직접 글씨와 서화를 배워 문화재에 대한 안목을 익히고, 그의 권유를 받아 문화재를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다. 간송은 1938년 그동안 수집한 문화재를 정리하여 빛나는 보물을 모아둔 집이라는 뜻을 가진 사립 박물관 ‘보화각(葆華閣)’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지금의 간송미술관이다. 오세창 선생은 문화적으로 많은 일을 했지만 나는 그 무엇보다도 사람의 마음에 낙관 인을 찍은 일이야 말로 가장 큰 업적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낙관이란 글씨나 그림을 완성한 후 도장을 찍는 것으로, 화룡점정(畵龍點睛)처럼 작품에 혼을 실어 넣는 마무리라고 할 수 있다. 낙관 인이 없으면 미완성 작품으로 보일 정도로 도장의 의미는 중요하다. 도장이 없어도 작가의 혼을 느낄 수만 있다면 상관없지 않느냐고 하지만 마무리가 없으면 한 구석이 허전할 수밖에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 열심히 사는 이유가 서화의 낙관 인처럼 인생의 마무리 도장을 잘 찍고자 함이 아니던가. 하지만 인생을 살면서 도장 하나 찍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매일 매일 열심히 도장을 찍다보면 어느새 진한 인생의 낙관 인이 찍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뿐이다. 지인도 비록 낙관 인이 없어진 글씨이지만 마음으로 도장을 찍어 글씨를 준 노인의 마음을 담아두고 있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