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명 첫 시집
김지명 첫 시집
시인 김지명 씨(사진)가 첫 시집 '쇼펜하우어 필경사'(천년의시작)를 펴냈다. 시인은 평소 환영을 동반한 상상력의 무한 확장을 통해 자신의 시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창작에 몰두해왔다. 53편의 작품이 실린 이번 첫 시집에서도 언어와 존재의 무의식적 현상을 진지하게 탐색하는 흔적이 곳곳에서 포착된다.
안개 낀 풍경이 나를 점령한다
가능한 이성을 다해 착해지려한다
배수진을 친 곳에 젊음은 야생 골짜기라고 쓴다
가시덤불 속에 붉은 볕이 흩어져 있다
산양이 혀를 거두어 절벽을 오른다
숨을 모은 안개가 물방울 탄환을 쏜다
적막을 디딘 새들만이 소음을 경청한다
함부로 과녁을 팔지 않는
숲이 방언을 흘려보낸다
무릎 꿇은 개가 마른 뼈를 깨물어 댄다
절벽 한 쪽이 절개되고
창자 같은 도랑이 넓어진다
사마귀 날개가 짙어진다
산봉우리 몇 개가 북쪽으로 옮겨 간다
초록에서 트림 냄새가 난다
밤마다 낮은 거래되고
밤이 낮의 초록을 흥정하는 동안
멀리 안광이 흔들린다
흘레붙은 개가 신음을 흘린다
당신이 자서전에서 외출하고 있다
- '쇼펜하우어 필경사' 전문
김지명 시인의 2013년 매일신문 등단작이자 첫 시집 표제작인 '쇼펜하우어 필경사'는 한 편의 판타지를 연상시킨다. 작품 속 필경사는 "젊음은 야생 골짜기"이며 그곳에는 가시덤불과 절벽으로 이루어진 숲이 있다고 쓴다. 숲은 "숨을 모은 안개가 물방울 탄환을 쏘고", "방언을 흘려보내는" 혼돈의 공간이다. 여기서 필경사로 은유된 시인은 '이성'의 명확함보다는 '애매모호하지만 신비스러운 기억'을 채집하고 인화한다.
시인이 창조한 필경사 이미지는 신성한 힘을 가진 영매라는 존재로 이전 확장된다. 영매는 "오로라의 리듬 아래// 노래할 때마다 씨눈바위취 향이 퍼지는"('영매') 순간을 낚아채 그것을 들려주는 존재(유성호 평론가)이다. 즉, 시인의 또다른 이름인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시인이란 우주가 불러주는 노래를 받아쓰는 사람'(안도현)이라는 인식과도 일맥상통한다.
과거 김지명은 "서정시의 풍요로운 언어 질감, 모더니즘의 형이상학적 사유, 해체시의 기존 관념 탈피 등 세 가지 중심의 자장을 마련해야 한다는 화두를 얻게 됐다. 나는 이 세 가지 특장을 동시에 아우를 수 있는 시를 쓰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시집에는 이러한 그의 실존적 자의식이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반영돼 있다.
최서림 시인은 김지명에 대해 "우리의 삶을 시시각각 옥죄어 오는 괴물과 맞붙어 싸우려면, 그 끝없는 싸움에서 지치지 않으려면 가면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김지명의 가면 뒤에는 또 다른 가면이 아니라, 민낯의 생 얼굴이 자리잡고 있다.(…) 이 알맹이, 민낯이 그로 하여금 현실과의 긴장 관계를 유지하게 해 준다. 이 긴장 관계는 이질적인 이미지들 간 불연속의 연속이라는 해체 구성과도 관련 있다. 그는 이 해체 구성이라는 전략으로 근대라는 신화 속에 도사리고 있는 연속적인 공식 역사를 단절시키고 새로운 공동체적인 질서를 형성코자 꿈꾸는 반딧불이 같은 존재"라고 평했다.
자신의 존재론적 불안을 "짐승 여럿이 사는 움막에서 동거했다"고 서술하는 김 시인. "침묵으로 수태 기간을 보내고 당신을 찾아 나선" 그의 여정이 이 시집에 오롯이 담겨 있다.
김지명 시인은 서울 출생으로 인하대 사회교육과를 졸업했으며 서울과학기술대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수료했다.
141쪽 9,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