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술한 회계제도에 세법 허점 악용사례 늘어
기업이 허술한 회계제도와 이와 맞물린 세법의 미비점을 악용해 세금을 탈루하거나 절세전략을 구사하는 행위가 위험수위에 도달하고 있다.
대기업 일감몰아주기 규제를 강화하자 일감을 주고받는 기업들의 내부거래 비중을 낮춰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 M&A에 나서고 있다. 비난은 받아도 처벌대상은 아니기에 기업들은 법의 맹점을 악용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특히 대기업 그룹의 2세와 3세가 기업을 승계할 때 막대한 상속세 부담을 줄이기 위해 세법의 허점을 찾아내 조세회피를 추구한다. 이같은 방식은 정교한 세법의 그물에 걸리지 않고 매끄럽게 빠져나가야 하기 때문에 뛰어난 법률및 세무회계 인적자원을 보유하고 있거나 치밀한 법률자문을 받을 수 있는 재벌기업에서 주로 이뤄진다.
일반인은 익숙하지 않은 전환사채(CB)나 신주인수권부사채(BW)가 주된 승계 수단으로 이용되고 비상장기업의 상장으로 시세차익을 거두는 방식으로 자녀들에게 편법 승계하기도 한다.
계열사 합병을 통해 일감몰아주기 규제를 피하는가 하면 이연법인세 감면제도를 활용해 세금 납부를 피하거나 최소액으로 줄이는 방법도 기업들이 이용하는 수법이다. 재단법인을 만들고 이 재단으로 주식을 증여하는 방법이나 페이퍼컴퍼니를 통한 투자회사의 배당금액 소득공제제도 악용 등 세법 규정을 역으로 이용해 세금납부를 피하기도 한다.
외국계 자본은 한술 더 떠 조세조약을 악용해 세금을 피해가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유입된 론스타, 뉴브리지 캐피탈 등 투기성 외국자본이 막대한 이익을 얻고도 국내 세법의 허점을 악용하거나 조세조약을 남용하는 수법으로 조세를 회피해 과세기반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정부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서둘러 세법을 개정해 이를 방지하기 위한 규정을 만들지만 '소급과세 금지' 원칙에 발목잡혀 과세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세법의 테두리 안에 다양한 절세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의 미비점을 교묘하게 피해 가는 것은 훗날 무거운 세금 부담으로 이어질 뿐 아니라 기업 이미지에도 치명적인 해를 가할 수 있다"고 충고한다.
■ 계열사 흡수해 일감몰아주기 증여세 회피
그룹 계열사 간의 합병도 증여세 회피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
SK C&C는 오는 8월 SK(주)와 합병해 총자산 13조2000억원의 명실상부한 그룹 지주회사로 거듭나게 된다. SK C&C가 SK(주)를 흡수합병함으로써 그룹 내 영향력도 커지고 최태원 SK그룹 회장 지배력이 강화된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 소버린 사태를 겪은 최 회장이 실질적 지배회사인 30.9% 지분을 보유해 안정적인 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새정치민주연합 김기식 의원은 SK C&C와 SK(주)의 합병을 상속세 및 증여세법상의 과세를 회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상속세 및 증여세법 시행령에서 지주회사와 그 자회사·손자회사·증손회사 간의 거래에서 발생한 매출액은 일감몰아주기 과세에서 제외하고 있어 이번 합병으로 지주회사가 되는 SK C&C는 일감몰아주기 과세 규정을 더이상 적용받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박중선 키움증권 책임연구원은 "SK(주)와 SK C&C 간 합병은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피하기 위한 목적에서 진행됐지만 최태원 회장과 SK(주)에도 긍정적"이라며 "합병 후 최태원 회장의 지배력은 보유 지분율 측면에서 삼성이나 현대차, LG 등의 다른 대기업 그룹보다 훨씬 높아 안정적"이라고 말했다.
현대제철도 계열사인 현대하이스코를 오는 7월 흡수합병한다. 이 합병으로 현대제철은 자산 31조원, 매출 20조원의 글로벌 톱10에 이름을 올리는 종합철강회사로 거듭나게 된다.
두 철강회사의 합병 이유는 “사업 시너지 발생 및 경영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는 게 그룹의 표면적 설명이다. 현대제철은 4000억원에 달하는 하이스코의 영업이익을 흡수해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현대차그룹이 필요한 모든 강종(鋼種)을 생산·공급할 수 있는 포트폴리오를 구축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현대제철은 계열사 흡수합병을 통해 현금부족 문제를 해결하면서 대규모 일감몰아주기 문제의 해소는 물론 순환출자 문제도 풀려는 의도가 있다는 분석이다. 한마디로 현대제철의 이번 합병은 내부거래를 통한 일감몰아주기 증여세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하고 현대차그룹 지배구조의 핵심인 현대모비스(현대제철은 모비스의 지분을 5.66% 보유)의 지분도 늘림으로써 정몽구·정의선 부자의 지분문제를 모두 해결하는 최고의 방법으로 평가되고 있다.
CJ그룹의 자회사인 CJ시스템즈는 지난해 12월 CJ올리브영을 흡수합병하면서 특수관계자 거래 비중이 75.5%에서 33.8%로 낮아졌다. CJ시스템즈와 합병한 CJ올리브영이 매출 규모가 크고(4578억원) 증가세도 높지만 계열사 매출 비중(1.3%)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합병 법인인 CJ이노플랫폼의 대주주인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지난해 말 일감몰아주기에 따른 증여세를 납부하지 않아도 됐다. CJ그룹 역시 계열사 합병으로 일감몰아주기 규제를 회피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 부실기업 인수·재단출연 통한 절세기법 성행
부실기업을 인수해 법인세를 절감하는 사례도 있다. EG건설은 지난 3월 동양건설산업을 인수해 대규모 법인세 절감효과를 누리게 됐다. 2011년 4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 4년여간 법정관리를 받은 동양건설산업이 실적 부진으로 세법상 법인세 공제를 받을 수 있는 ‘이월결손금’이 불어난 데 따른 것이다.
EG건설은 외형 성장세가 이어지고 있어 법인세 부담이 큰 상태였으나 동양건설산업의 이월결손금을 활용해 법인세를 차감할 수 있게됐다. 동양건설산업은 2011년 법정관리 개시 후 1500억 원의 이월결손금이 쌓여 세법에 따라 10년에 걸쳐 이월결손금을 공제받을 수 있다.
동양건설산업이 이월결손금을 모두 공제받을 경우 300억원(법인세율 22% 적용) 이상의 세액을 절감할 수 있다. 이는 EG건설의 동양건설사업 인수대금 160억 원의 두 배에 가까운 금액이다.
결과적으로 EG건설은 법인세를 절감한 돈으로 동양건설산업을 수중에 넣게된 셈이다.
M&A 업계의 관계자는 "이월결손금 활용을 목적으로 한 기업 인수는 증권사, 은행 등 금융회사들이 법인세 부담을 덜기 위해 자주 찾던 방식"이라며 "특히 인수기업의 외형 성장이 본격화되는 시점에 M&A가 이뤄질 경우 절세효과가 매우 크다"고 설명했다.
재단으로의 주식 증여 또한 상속세를 피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지난 2013년 7월 최수부 전 광동제약 회장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지분 중 4.35%가 가산문화재단에 증여되자 재계에서는 상속세 절세와 경영권 강화를 위한 포석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광동제약 관계자는 "최 전 회장 생전 뜻에 따라 가족회의 끝에 문화재단에 증여하기로 결론이 난 사안"이라며 "상속세 절세와는 상관없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이 증여로 가산문화재단의 광동제약 지분율은 0.65%에서 5.00%로 늘어나 단번에 2대 주주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당시 광동제약의 지분 6.59％를 보유하고 있던 최성원 광동제약 부회장은 가산문화재단 5.0％, 광동생활건강 3.05％ 등을 다 합쳐 지분율이 17.81％로 올라갔다. 현행법상 특정 회사가 지분 5%를 초과하지 않는 주식을 공익재단에 출연할 경우 증여세가 비과세된다.
■ 멕쿼리인프라, 3년간 4천억원이상 이익내고도 법인세 '0'
법인세법을 교묘하게 활용해 천문학적인 이익을 내고도 법인세를 전혀내지 않는 기업이 있다.
재정치민주연합 박범계 의원에 따르면 2012년에 580개 법인이 2조5997억원, 2013년 557개 법인이 2조4508억원의 소득공제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표1 참조)
맥쿼리인프라는 2011년 이후 3년간 4184억원의 당기순이익을 내고도 법인세법 제51조의2를 적용해 단 한푼의 법인세를 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법인세법 제51조의2는 유동화전문회사의 성격을 가진 내국법인이 배당가능이익의 90% 이상을 배당한 경우 그 금액을 해당 사업연도의 소득금액에서 공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맥쿼리인프라는 주주들에게 배당가능이익을 90%이상 배분했다는 사유로 법인세법 제51조의2에 따라 배당금액 소득공제를 받고 법인세 비용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2011~2013회계연도의 감사보고서에서 밝혔다.
박 의원에게 제출한 국세청자료에 따르면 2013년의 경우 과세표준이 0원인 법인은 532개에 이르고 이 법인들이 배당금액 소득공제를 받아가는 액수는 무려 2조2246억원에 이른다. (표2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