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투명한 회계 관행을 시정하기 위해 2011년 K-IFRS(한국채택국제회계기준)가 전면 도입됐지만 회계기준을 어기는 기업은 도리어 늘어나고 있다.
K-IFRS가 종전의 회계기준인 K-GAAP(한국기업해계기준)에 비해 규정이 느슨해 기업들이 재량권을 지나치게 이용하거나 자의적으로 적용하는 사례가 줄어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이 공개한 ‘2014년 감사보고서 감리결과 분석’에 따르면 K-IFRS 도입 직전 해인 2010년 19.4%였던 감리 지적비율은 2011년 29.3%로 오히려 늘어났다.
◆…자료:금융감독원
특히 감리대상 회사를 2010년 222개 사에서 지난해에는 53개로 대폭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회계기준을 위반한 비율은 늘어났다. 게다가 지난해 고의적으로 위반한 사례도 31.6%나 적발돼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 감사보고서 주석사항의 고의적 누락은 ‘단골메뉴’
K-IFRS는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의 보고 내용을 기업의 현실에 맞게 최소한의 내용만 표시하고 상세한 내용은 감사보고서 주석사항에 표기토록 하고 있다. 문제는 이를 악용해 상당수 기업들이 고의적으로 누락하거나 형식적인 기술로 얼버무리고 있는 점이다.
과거 K-GAAP는 각기 다른 형태로 발생하는 거래와 사건들에 대해 개별적으로 회계처리지침을 정하고 있다. 반면 K-IFRS는 경제적 실질을 우선시 하는 까닭에 상대적으로 기준이 구체적이지 못해 기업들이 재량권을 남용하고픈 유혹에 빠지게 만든다는 지적이다.
IFRS의 경우 몇몇 필수항목을 제외하고는 기업이 경제적 상황에 맞는 회계처리 방법을 채택토록 함으로써 재량의 범위가 이전에 비해 훨씬 넓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류 수입사인 B사의 감사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116억2900만원의 매출에 매출원가는 34억4600만원으로 81억8300만원의 매출총이익을 올렸으나 판매비와 관리비로 106억4000만원을 지출함으로써 24억5600만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이 회사는 이 같은 영업적자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업외수익 43억2500만원이 발생해 법인세차감전순이익은 역으로 15억4900만원 흑자를 기록했다. ‘잡이익’으로 40억2600만원을 벌어들였기 때문이다.
K-IFRS 규정에 의하면 이같은 내용은 당연히 감사보고서 주석사항에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맞겠지만 ‘특수 관계자인 지배기업으로부터의 잡이익’으로만 표시하고 있어 무슨 내용인지를 알 수 없다. 이에 대해 회계감사 또한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았다.
상장회사인 S기술의 2011년 매출액은 525억4900만원에 불과했지만 특수관계자에게 1955억7100만원의 지급보증을 제공했다. 그러나 주석사항에서 고의적으로 누락시켰으며 결국 재무상황 악화로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투자자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세월호 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청해진해운도 특수관계자와 자금거래, 유형자산 매입거래, 수수료 지급 등의 거래가 있었으나 주석사항에 기재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비상장회사인 트라이곤코리아의 경우에도 관계회사에 대한 지급보증 사실, 특수관계자와의 자금 대차거래를 감사보고서 주석사항에서 누락시켰다. 기업들이 의도적으로 주석사항을 누락시고 있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사건들이다.
■ 기업의 회계처리 재량권 늘려 분식가능성 높아져
K-IFRS 적용으로 매출에 따른 수익인식 기준이 달라지면서 분식가능성이 높아진 것도 문제다.
수익인식기준인 ‘경제적 효익의 유입가능성에 대한 판단기준’을 K-GGAP는 매우 높은 경우(80% 이상)로 정하고 있다. 하지만 K-IFRS는 상당한 가능성(50% 초과)으로 규정, 수익의 인식시기를 조절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졌다는 평가다.
일시적으로 많은 수익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기업의 경우 다소 비관적인 평가로 수익을 차기 이후로 이월해 세금이나 각종 비용을 줄이는 수단으로 이용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반면 재무적 융통성(대출 등 자금의 조달)이 필요한 기업의 경우 수익을 조기에 인식하는 방법을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금융감독원 감사보고서 감리에서 지적된 일부 기업들의 경우 부실자산을 재무제표에 반영하여 재무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재량권을 지나치게 발휘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10월 법정관리를 신청한 모뉴엘은 2013년말 기준 1조2737억원의 매출에 영업이익 1103억 원, 당기순이익 602억원을 기록한 촉망받는 벤처기업으로 보였지만 실제는 품질저하나 진부화(오래되어 쓸모없는)된 1만원짜리 홈씨어어터를 250만원짜리라고 수출하거나 실제 팔리는 것처럼 속였다.
대한전선 또한 불량 매출채권을 정상채권으로 분류해 매출과 자산, 이익을 부풀렸다. 받을 수 없는 채권을 받을 수 있는 채권으로 속인 점은 모뉴엘과 동일한 수법이었다. 이같은 회계부정은 K-IFRS의 규정이 느슨한 것도 한 몫 거들었다고 회계전문가들은 말한다.
올해 3월 법정관리를 신청한 우양에이치씨는 재무제표상 연간 200억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내는 건실한 회사였지만 전자어음 127억원도 결제하지 못했다. 회사는 조회공시 답변을 통해 "과거 수익 인식과 관련해 수익인식 방법 중 일부에서 오류가 발생했다"고 밝혀 분식회계 사실을 인정했다.
회계법인의 한 회계사는 “이들 회사의 공통점은 재고자산을 부풀리거나 불량 매출채권을 회수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분류해 이익을 과대 계상하는 수단을 사용했다”며 “수익의 인식을 판단하는 기준이 느슨한 것도 분식회계에 한 몫 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 소 잃었더라도 외양간 고쳐야
금융감독원은 지난해 12월 모뉴엘 등과 같은 분식회계 사고를 막기 위해 올해부터 매출채권 매각관련 회계처리의 적정성, 특수관계자 간 거래, 영업이익 산정과 관련된 항목의 집중 점검 등을 천명했다.
특히 주석사항의 고의적 누락, 재고조정과 자의적 평가 방법을 통한 이익 부풀리기, 대주주 등과의 거래 내용 은폐·축소를 테마감리 대상으로 정하고 감사보고서의 집중적인 감리를 진행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금융감독원이 집중 점검하겠다고 밝힌 사항들은 기업 규모를 가리지 않고 재발하고 있다. 유사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비슷한 방침을 밝힌 바 있지만 최근에도 우양에이치씨 사태가 또 터졌다. 한마디로 공염불에 그치고 있는 셈이다.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IFRS의 도입이 회계기준을 단순히 대체하거나 조문의 문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속돼온 시스템과 사고체계를 변화시키는 혁신적 과제라는 인식이 우선돼야 한다.
회계법인의 한 회계사는 “감독당국의 지도점검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다소 모호하거나 자의적 판단이 개입될 여지가 있는 부분을 체계적으로 보완, 기업들이 회계부정의 유혹을 느끼지 않도록 개선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들이 과거에 고의나 실수로 저지른 회계부정 행위에 대한 대사면을 통해 시정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향후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예방하는 것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할 시기”라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