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재무건전성을 제고하기 위해 마련된 충당금과 상각제도가 오히려 회계분식의 통로가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상장회사인 S기술과 청해진해운, 모뉴엘과 대한전선, 그리고 우양에이치씨까지 상장회사와 비상장 회사를 가리지 않고 회계문제가 드러난 회사는 어김없이 대손충당금 문제가 따라다녔다. 그만큼 손쉬운 분식회계 수단이라는 의미다.
전문가들은 충당금을 산출하는 방법의 모호성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 K-IFRS(한국채택국제회계기준)의 경우 충당금을 ‘실제 대손이 발생한 객관적 기준이 있을 때에만 인식’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기준을 악용해 회수 불가능 채권을 정상채권으로 둔갑시키거나 매출채권이나 대여금 의 대손충당금을 고의로 줄이거나 계상하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종전에는 정상채권이라 하더라도 세법의 기준에 따라 대손충당금 1%를 적립하는 기업들이 많았지만 K-IFRS 적용으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며 “기간 경과에 대한 특별한 제한이 없는 까닭에 극단적인 경우 기간이 아무리 오래 경과해도 정상채권으로 분류, 충당금 적립을 않거나 손실로 처리하지 않는 경우도 발견된다”고 지적했다.
■ 회수가능성 낮은 자산도 정상 자산으로 둔갑
매출채권(외상매출금)의 회수가능성이 높지 않아도 ‘객관적으로 회수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증빙이 없는 한 충당금을 적립해야할 의무가 없어 분식회계의 유혹을 더욱 크게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증권선물위원회에 발각된 신풍제약의 경우 2009년과 2010년 매출채권은 100억원 이상 과다 계상했지만 부실화돼 받을 수 없는 채권에 대해서는 충당금을 적게 쌓아 이익을 부풀렸다.
5000여억원의 분식회계를 한 것으로 밝혀진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도 2008년부터 5년 동안이나 STX조선해양과 STX 건설 등이 구매한 부품·자재·원료의 가격을 실제보다 낮게 장부에 기재하고 매출채권이나 재고자산에 대한 충당금을 축소해 대규모 부실을 숨겼다.
또 지난해 금융감독원의 감서보고서 감리에 지적된 A사는 거래처의 폐업 등으로 회수가 불가능한 부도어음 전액을 대손충당금으로 설정했어야 했지만 정상채권으로 속여 대손충당금 설정금액을 크게 줄여 계상했다.
N사 또한 담보가치가 전혀 없는 부동산을 제3자로부터 담보로 제공받아 채권 회수가 가능한 것처럼 꾸며 매출채권 등에 대한 대손충당금을 축소했다. 또한 최대주주와 친분이 있는 법인과 개인에게 빌려준 대여금의 회수가능성이 거의 없음에도 대손충당금을 설정하지 않아 적발됐다.
■ 감가상각비 반영 않는 건 ‘애교수준’
분식회계를 하는 기업들은 충당금만이 아닌 감가상각비나 감모손실 등 각종 자산계정을 다양한 방법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감독당국이나 회계감사의 보다 정밀한 감시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금융감독원의 회계 감리에 적발된 기업들의 회계부정 사례는 그 형태가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회계과목이 다양한 만큼 분식의 수단도 많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금융감독원에 적발된 F사는 투자한 회사의 자본이 완전히 잠식되고 영업까지 중단돼 자산성이 없는 매도가능증권(전환사채)에 대해 감액손실을 인식하지 않고 정상적인 자산으로 과대 계상했다.
B사는 자회사가 추진하고 있던 부동산 개발 사업이 부동산 경기침체로 사업추진이 곤란함에도 명확한 근거도 없이 건설용지 등 재고자산의 감액손실을 인정치 않았다.
아파트 시행사업의 시공사인 E사는 시행사가 채무를 제외한 관련 사업권, 토지 및 은행 PF차입금 등을 새로운 시행사에 이전시키고 폐업하여 대여금의 회수가 불가능한 것이 명백했음에도 전액 감액하지 않고 대손충당금 10%만 적립하는데 그쳤다.
S사는 신축한 공장용 건물의 사용 시기를 늦춰 감가상각비를 과소 계상하는 수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회계전문가 K씨는 “기업들이 분식회계를 작정하면 교묘한 수단과 방법들이 곳곳에 널려있어 회계사들도 발견하기 쉽지 않다”며 “손상차손이나 감가상각비 등을 반영하지 않는 것은 애교 수준”이라고 말했다.
■ 명확한 기준 설정해 분식회계 차단해야
위에서 적발된 사례처럼 기업들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분식회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문가들은 충당금의 임의적 적립률 조정을 막기 위해서는 일반 기업들도 은행처럼 제도적으로 명확한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은행의 경우 연체기간을 기준으로 1개월 미만인 경우 정상, 3개월 미만인 경우 요주의, 3개월 이상 고정, 3개월 이상 1년 미만 회수의문, 1년 이상인 경우 추정손실 등 5개 등급으로 구분해 대손충당금을 적립한다.
일반 기업과 은행의 채권회수 기간이 상이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충당금 쌓는 것을 기업에 맡겨두는 것은 회계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차원에서 재고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현행 매출채권이나 대여금 등에 대해 일정 금액을 추산하여 설정토록 돼 있는 대손충당금은 구체성 없이 ‘객관적 사유 발생 시에만 대손 충당금의 설정을 허용’하고 있다. 때문에 재무적 성과가 좋지 않은 기업들은 항상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다.
회계법인의 한 회계사는 “기업의 자산과 부채를 현실적으로 평가해 재무제표의 신뢰성을 높이고자 도입한 K-IFRS에서 ‘객관적 사유발생’이라는 애매한 문구를 사용해 부정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탈출구가 돼 회계정보를 왜곡시키는 현실은 시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충당금의 성격상 회계담당자나 경영진의 의견이 개입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기업들의 인식전환이 선행돼야 한다”며 “당국도 임의성이 개입되지 않도록 기준을 보다 명확화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