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 정구정 현 세무사회장이 이 격언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겼다면, 그는 세무사회 역사상 큰 업적을 남긴 인물로 기록됐을 것이다. 하지만 정 회장은 모두가 박수를 칠 때 차마 돌아서 떠나지 못했다. 무수한 논란을 만들어 내며 3선 회장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그에 대한 세무사회 역사의 평가는 어떻게 남겨질까. 사진은 지난 2012년 4월 세무사회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 은탑산업훈장을 수여받는 정구정 회장의 모습.
시계를 거꾸로 돌려 2011년 12월29일로 되돌아가보자.
이날 세무사 업계에 '급보'가 날아들었다. 공인회계사에 대한 세무사 자동자격 부여제도를 폐지하는 내용의 세무사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2003년, 공인회계사와 변호사에 대해 세무사 명칭 사용이 전면 금지된 이후 8년 만에 수 십년 뿌리 깊었던 자동자격 제도가 폐지된 것이다.
이는 분명 정 회장의 업적으로 평가할 만한 대목이다.
오랜 시간 동안 세무사들의 자존심을 짓눌러 왔던 부분이 2차례에 걸친 세무사법 개정으로 해소됐다는 측면에서 명분상 성공적인 제도개편이었기 때문이다.
"김 빠진 샴페인을 터뜨리다"
이 제도가 세무사들에게 어떤 실익을 가져다 준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상대방인 회계사회 입장을 살펴보면 대략 알 수 있다.
2011년 당시 회계사회는 제도 개편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자동자격 폐지로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지만 실질적 측면, 즉 업무적인 측면에서는 별다른 지장이 없기 때문에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특히 일부 회계사들은 자동자격을 구습으로 간주, 당연한 법 개정이 이루어졌다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을 정도다. 어치피 시행되고 있는 명칭사용금지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세무사법 개정 이전 세무사자격을 받은 회계사는 여전히 그 자격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세무사법 개정 이후 회계사 시험에 합격한 회계사들에게만 세무사 자격이 주어지지 않을 뿐, 이들 역시 회계사법에 의해 세무업무를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다.
정구정 회장이 엄청난 일을 해 낸 것처럼 축배를 들었다면 상대방인 회계사회는 초상집 분위기여야 정상인데 회계사회 입장은 의외로 조용했다. 희비가 확연히 엇갈렸어야 할 두 단체의 입장이 그렇지가 않았다면 두 단체 중 한 단체는 정상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세무사회가 샴페인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며 상당수 회계사들은 오히려 "별로 실익이 없는 제도개편을 가지고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며 의아해 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동안 회계사회가 자동자격 폐지에 대해 반대 입장을 견지해 온 것은 자동자격 폐지가 도화선이 되어 이후 세무업무를 세무사만 할 수 있도록 관련 법령 개정 작업이 이루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자동자격 폐지 이후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결국 세무사들에게 큰 실익도 없이 상대방인 회계사들의 자존심을 긁어 놓으면서 세무사 제도 개선에 대한 회계사회의 경계심을 높여 회계사회의 대(對)세무사회 견제력만 키운 꼴이 됐다. 세무사 제도 개선은 회계사는 물론 변호사 집단이라는 버거운 상대방이 있기 때문에 세무사회 입맛대로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세무대리 시장의 패턴은 1999년, 2003년, 2011년 3차례에 걸친 세무사법 개정을 통해 보호되고 육성되어야 할 세무사들에게 더욱 불리한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다.
막강한 자본력으로 우수한 인재풀을 여러 루트를 통해 충원하는 대형 로펌과 회계법인들의 세무대리 시장 체감 점유율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평가다.
로펌, 회계법인들과 비등한 수준의 규모를 갖춘 십 여개 세무법인들이 경쟁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이보다 더 많은 수의 개인 세무사들은 더욱 치열해진 기장대리 시장에서의 출혈경쟁에 시달리고 있는 형편이다.
송춘달 전 서울지방세무사회장은 "당시(2011년) 세무사법 개정은 형식적이나마 자동자격을 없앴으니 50년 숙원사업을 달성했다고 표현한 것"이라며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공인회계사는 지금이나 예전이나 세무대리 업무를 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며 "그 숙원사업 달성이라는 것이 세무사들의 밥벌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 상태로 가다가는 20~30년 후 즈음해서는 개인 세무사들의 입지가 완전히 무너져 버릴 수도 있다는 위기론도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세무사 자격은 없지만 국세청 출신이라는 '프리미엄'을 갖춘 인력들을 영입할 능력이 되는 일부 대형 세무법인만이 대형 로펌과 회계법인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현재의 상황만 놓고 볼 때 20~30년 후 세무사 제도의 미래는 결코 밝지가 않다는 것이다.
◆…정구정, 50년 숙원사업 성취하다 = 지난 2012년 1월2일자 세무사회보에는 세무사회 50년 숙원이 성취됐다는 제목의 기사가 1면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정구정 회장의 열정과 집념으로 얻어낸 성과라는 소제목이 달렸다.
◆…기사의 주어는 언제나 '정구정' = '태산을 옮겼다' '기적' 등으로 표현된 세무사법 개정안 통과. 그리고 그 기적을 만들어낸 주인공이 정구정 회장이라는 표현이 기사 가득 채워졌다.
◆…세무사회 50년의 꿈이 이루어졌다? = 2012년 1월2일자 세무사회보는 '숙원사업 달성'에 관한 기사로 도배가 되다시피 했다. 사진은 세무사회 홈페이지 회원게시판의 회원들의 반응을 실은 기사.
구종태 전 세무사회장, 더 큰 업적 남겼지만 '차분'
세무사 100년 대계의 초석을 닦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당선된 구종태 회장은 4년 동안의 재임 기간 중 많은 업적을 쌓았다.
이 중 하나가 1999년 국세공무원에 대한 세무사 자동자격 폐지.
구 회장은 당시 발행되던 세무사회보에 제도개선 내용을 소개하는 정도로 그쳤을 뿐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하지 않았다. 세무사들에게 득이 됐으면 그만이지 세무사회장이 요란스레 치적을 자랑하는 것은 회원들에 대한 예의와 도리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 회장은 마치 법 개정 전 과정이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어졌다는 식의 '찬양'을 세무사회보에 가득 채워 넣었다.
실상 세무사법 개정이라는 열매는 정 회장 개인의 힘으로 만들어졌다고 보기 힘들다.
십 수년의 시간 동안 세무사 업계 구성원들이 힘을 쏟았고, 전문자격사 선진화를 위한 제도개편 및 개방화 논의가 급물살을 타는 등 시대적 분위기가 결합되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하지만 정 회장과 그의 지지자들은 모든 것이 정 회장 개인의 능력으로 이루어졌다는 식으로 호들갑을 떨며 업계 안팎에서 고개를 들고 있던, 실익 측면에서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 법 개정이었다는 평가를 애써 무시한 이유는 무엇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