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서울세관 김경일 관세행정관이 작성했습니다.)
"5년이 지나고…"
2015년 1월 대한(大寒)이 며칠 전에 지나고 하얀 눈발이 휘날려 모두가 추위에 움츠리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 서울세관 외환조사과 직원들도 지난 한해를 잘 마무리하고 "어떻게 하면 새해를 잘 맞이할 수 있을까?"하는 구상을 하며 차분한 분위기의 겨울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날 오후 조용한 사무실 분위기의 적막을 가르며 며칠 전 새로 부임하신 과장님께서 나를 부르신다. "김 반장". 누구나 그렇듯이 과장님 호출에 반사적으로 "예" 라고 대답하며 과장실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우리 과장님은 관세청 외환조사 분야에 살아있는 역사로 정평이 나신 분으로 나로서는 그동안 조사업무를 하며 근처에서 자주는 뵈었지만 직접 같은 과에서 호흡하기는 처음인데 개인적으로 많은 것을 배워야겠다는 기대를 갖고 있던 참이었다.
과장님께서 바로 말씀을 꺼내신다. 약 5년 전 그러니까 2010년 과장님께서 수사팀장 시절 정보분석을 통해 유명 여성의류 수입상에 대해 재산국외도피 사건을 진행한 것이 있었는데, 당시 피의자들의 홍콩 혐의계좌를 입수하기 위해 홍콩 법무부에 국제사법공조 요청한 건이 며칠 전 회신되어 그 자료가 법무부를 통해 검찰에 도착해 있으니 지금 검찰에 가서 당시 기록과 사법공조자료를 수령해 검토하라는 지시였다.
난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뇌리를 스치는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이면 내가 검찰청에 파견 나가 있을 때였는데 당시 P반장이 이 사건으로 검찰에 자주 수사지휘를 들어오면서 피의자들의 혐의 부인으로 많이 힘들어 했던 기억이 난 것이다.
"아. 그 사건이 나에게 올 줄이야" 순간 나에게 염려스러움이 앞섰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나는 눈발이 날리는 강남 한복판을 가로질러 사건기록일체와 사법공조자료를 가지러 서초동으로 향했다.
"이제 시작이다!"
예상대로 홍콩 법무부에서 온 자료는 다름 아닌 피의자와 그 관련자들의 금융거래 자료들이었다. 그런데 얼핏 봐도 회신된 자료의 양이 너무 방대했다. 금융거래내역은 입출금 건 기준으로 9800여건이었고 은행전표도 A4박스 기준으로 5박스가 넘었으니 1만 5000장이상은 족히 되었다.
또한, 회신된 계좌가 총 12개인데 거래은행이 홍콩 H은행, D은행 등 6개 은행이나 되어 양식도 모두 달랐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계좌거래내역에 거래상대방 정보가 있으나 홍콩에서 회신된 계좌의 입출금 내역에는 거래상대방에 대한 정보는 없고 입출금액만 기록되어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자금의 흐름을 추적하기 위함인데 거래상대방이 없는 자금의 흐름이란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입출금 거래상대방을 알려면 은행전표를 일일이 확인하는 작업을 해야 되는 것이다.
"이걸 언제 다 정리하나" 내가 한마디 내뱉었다. 모두들 아무 말이 없었다. 거기다가 가장 중요한 사건의 열쇠가 되는 H은행전표가 아직 홍콩 당국에서 회신되지 않았다. 며칠 전 '새로 부임하신 과장님을 모시고 어떻게 하면 새해를 잘 준비할 수 있을까?'하는 구상은 필요 없는 고민이었다. 왜냐하면 과장님께서 먼저 선물을 주셨기 때문.
이제 시작이다. 우선 회신된 계좌거래내역을 정리해야 분석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밤낮 없이 계좌 정리에 매달렸다. 때마침 과장님께서 수습직원 2명도 배치해 주신 상황이라 난 홍콩에서 온 은행계좌 보는 법을 수습직원들에게 알려주고 열심히 회신된 금융거래내역을 계좌별, 일자별 엑셀파일로 정리하도록 독려했다.
그러면서 수습직원들에게 "사건 잘 끝나면 꼭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자"고 약속까지 했다. 삼겹살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이기도 하다. 어쨌든 정신없이 이렇게 하루하루가 지남에 따라 한 계좌 한 계좌가 정리되었다. 정리된 계좌에 일자별로 해당전표를 찾아 거래상대방을 추적해 나갔다. 확인된 전표상의 거래상대방을 엑셀파일에 기재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분석에 돌입했다.
드디어 자금흐름의 윤곽이 들어나기 시작했다. 피의자 J와 공범인 K는 국내에 법인체인 M사를 운영하면서 이태리 브랜드인 여성용 고급 의류를 국내 백화점에서 판매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홍콩에 페이퍼컴퍼이를 비밀리에 설립해 국내 면세점에 이태리 동일 브랜드 여성의류를 수출판매하고 있었던 것이다.
홍콩에서 국내 면세점에 수출해 판매한 수익금은 국내로 귀속하여 법인세, 소득세 등 세금을 납부해야하지만 그렇치 않고 홍콩계좌로 빼돌린 것이다. 또 그 자금이 다시 피의자의 가족들 홍콩, 미국, 스위스 등 해외계좌로 자금세탁되어 흘러들어간 정황이 계속해 드러났다.
이러한 위법사실이 계속 확인되면서 우리는 지칠 줄도 모르고 매일 야근을 하며 계좌정리와 분석에 탄력을 더해갔다. 가장 힘든 것은 하루걸러 메뉴를 바꾸어가며 '짜장면'과 '볶음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을 뿐. 우리는 이번기회에 해외계좌와 전표 판독법을 제대로 배워보자고 스스로 주문을 걸어가며 계좌와 전표를 보고 또 봤다.
이상하게 하루하루가 지나가도 지치질 않았다. 어느 조사요원이나 그러하듯이 하나의 사건이 시작되면 본능적으로 '집착'이라는 단어에 몸과 마음이 지배되기 때문인 줄도 모른다. 우린 주말을 반납하고 홍콩에서 온 다양한 은행전표, 수표와의 전쟁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주말, 평일에 계속된 야근으로 나를 보지 못한 유치원생 딸아이가 끝내 사무실로 따라 오겠다고 한다.
아빠가 근무하는 사무실을 보고 싶어서일까? 딸아이와 함께 세관 사무실에서 도착해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는데 딸아이가 노란색 포스트잇에 뭔가를 그려 준다. "♡아빠 사랑해요♡"
"경칩(驚蟄)"
그렇게 1월 중순에 시작된 일이 2월이 지나고 3월초가 다가왔다. 조바심이 났다. 계좌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가는데 제일 중요한 사건의 열쇠인 도피자금의 사용처를 알 수 있는 혐의거래의 H은행 전표가 홍콩에서 도착하지 않았다. 난 검찰청에 "추가자료가 언제 도착하냐?"며 하루가 멀다하고 전화를 걸어댔다. 이대로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건가? 난 피의자를 빨리 대면하고 싶었다. 답답했다.
경칩이 지난 3월의 어느 날 오후, 점심식사를 마친 시간에 사무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은 정말 따뜻했다. 그렇게 잠시 노곤함을 즐기던 중 갑자기 책상전화 벨이 울렸다. 검찰청으로부터의 "홍콩 법무부에서 특급배송으로 서류가 도착했다"는 내용의 전화가 온 것이다.
드디어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혐의계좌의 H은행 전표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제 H은행 전표만 확인하면 도피된 자금이 누구에게 흘러들어갔는지, 어떻게 사용됐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는 확신에 바로 검찰로 달려가 2박스 분량의 서류를 인수해 왔다.
조바심과 궁금함에 난 박스를 개봉해 그날 늦게까지 전표를 하나하나 확인해 보았다. 도피된 재산이 입금된 혐의계좌에서 피의자 자신의 가족들 해외계좌로 송금된 것 외에도 누구인지 아직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국내 내국인 150여명에게 자금이 송금된 것을 확인되었다. 그런데 그 수법이 치밀했다. 모두 미화 1만불 이하로 340여회에 걸쳐 여러 번 나뉘어 150여명에게 송금한 것이다.
아. 차명을 이용한 것이다. 내국인 명의 차명을 이용해 국내로 반입한 금액만도 수십억에 달했다. 경칩에 개구리가 얼음을 깨고 나오듯이 이제야 사건 전모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①-下편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