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오후의 가벼운 적막을 깨는 고성이 귓전을 때렸다.
고성의 진원지는 서울지방국세청사 1층에 마련된 기자실 맞은편 민원상담실. 세금을 부과받은 민원인이 서울청 조사관과 상담하던 도중 분을 못이기고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서울청은 1층에 민원인과 국세공무원이 1:1로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민원상담실을 마련해 운영하고 있는데, 평소에도 민원상담실에서는 국세공무원과 마주한 납세자가 내지르는 육두문자가 간혹(?) 섞인 고성이 들려오던 터였다.
이날 들려온 납세자의 고성은 유난히 시끄러웠고, 이에 기자실 문을 닫기 위해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닫으려던 찰나, 맞은편에 열려있던 민원상담실 문틈 사이로 검은 양복을 입은 국세공무원이 60대로 추정되는 남성의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안절부절하는 모습이 보였다.
남성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났는지 조사관을 향해 계속해서 반말과 욕설을 동반한 폭언을 퍼부었다. 국세공무원은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진땀을 흘리며 과세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국세공무원은 세법에 따라 과세권을 집행했을 뿐이었다. 납세자 또한 세법에 의해 세금을 부과받은 것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실수가 있을 수 있었겠지만 국세공무원이 이 납세자로부터 수모를 당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납세자'라는 타이틀은 한 사람의 인격을 마음껏 짓밟아도 된다는, 특권까지 포함하고 있지 않다. 국세공무원이든 납세자든 속된 말로 계급장 떼고 문 밖을 나서면 그저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이다.
퇴근길, 유난히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지는 하루였다.
◆…격한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국세공무원들 = 납세자의 재산권에 '메스'를 들이대는 국세청의 특성상 일선 직원들이 접하는 납세자들의 반발과 저항은 매우 강하다. 하지만 직원들은 언제나 '친절'과 '서비스 정신'을 요구받고 있으며 이로 인한 정신적인 '소진'을 경험하기도 한다.
[국세공무원도 우리 '이웃'입니다] 캠페인을 마무리하며…
조세일보(www.joseilbo.com)는 지난 9월24일부터 10월26일까지 한달여 동안 '국세공무원도 우리 '이웃'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총 8편의 캠페인 기사를 연재했다.
국세청의 협조를 바탕으로 일선 세무서 현장에서 실제로 벌어졌고 벌어지고 있는 악성 민원인들에 대한 사례를 에피소드 중심으로 기사를 엮었으며, 현직 국세공무원들의 인터뷰도 함께 진행해 악성민원에 대한 속깊은 이야기도 다룰 수 있었다.
취재 도중 접하게 된 악성민원의 사례는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한 70대 남성이 자신에게 부과된 세금이 억울하다며 세무서 사무실에서 온몸에 시너를 붓고 라이터를 켜는 등 분신소동을 벌인 이야기를 접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세무서에 찾아온 납세자에게 폭행당한 국세공무원, 점심식사 시간에 찾아온 납세자 때문에 하던 식사를 멈추고 1시간 동안 밥대신 폭언과 욕설을 들어야 했던 국세공무원의 사례도 있었다.
어떤 납세자는 한 세무서에 대해 수년간 1만여건의 민원글을 국민신문고에 올리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집요함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직에 있는 국세공무원들은 캠페인 기사에 나온 사례들은 실제 벌어지는 일들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고 귀띔했다. 실제로는 기사에 나온 것보다 훨씬 많은 일들이 벌어지며 그 수위도 매우 높다는 것이었다.
일선 세무서 취재를 다니다보면 직원들은 종종 '예전엔 이렇지 않았는데 요새는 참 좋아졌다'는 말을 하곤 한다. '요새는 참 좋아졌다'는 말에서 왠지 모를 자조섞인 느낌이 드는 것은 아마도 그만큼 세무서 직원들이 겪는 고충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 정부가 국민 위에 군림하던 시절과는 달리 현재는 시민들이 정부에 당당히 서비스를 요구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정부의 역할은 '대민 서비스 기관'으로 전환된 지 한참이다.
국세청 또한 타 기관들과 마찬가지로 소속 직원들에게 납세자에 대한 '친절'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하고 있다. 친절은 중요한 가치다. 하지만 강제성이 다분한 공권력을 집행해야 하는 국세청의 업무 특성상 친절의 울타리는 행동반경을 제약할 수밖에 없다.
행동반경의 제약, 불친절한 납세자들을 상대로 친절해야 하는 국세공무원들의 격한 '감정노동'이 일상화가 됐다는 이야기다.
◆…세무서 직원들은 잠재적 정신질환자? = 모 일선 세무서 직원은 "세무서 직원들이 정신과 진료를 받으면 대부분 치료기간 3개월은 나올 것"이라며 "기사에 나온 이야기들은 빙산의 일각이다. 훨씬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 강도도 높다"고 말했다.
시민의 재산권에 메스를 들이대는 일을 하는 국세청의 특성상 납세자의 반발은 타 부처에 비해 강하다는 것이 공통된 지적. 국세공무원들의 감정노동 강도 또한 보이지 않고 수치화되지 않을 뿐 어마어마한 수준이라는 것이 국세공무원들의 한결같은 전언이다.
실제로 일선 세무서 직원들은 그들이 겪는 정신적 고통에 대해 지속적으로 불만을 토로해왔고, 국세청은 이러한 점을 우려해 일선 세무서 직원들, 특히 민원이 많다고 알려진 개인납세과 직원들을 대상으로 '힐링캠프'를 운영하는 등 나름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고 일선 직원들은 꼬집는다.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사고방식이 아직도 세무서를 찾는 납세자들 사이에 남아있는 것이 근본적인 이유라는 것이다. 납세자의 의식변화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풀기 힘든 숙제라는 이야기다. 어쩌면 영원히.
심각한 취업난 속에 너도나도 공무원 시험에 뛰어드는 요즘, 국세공무원은 더 이상 권위적인 과세관청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이 아니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옆집 총각, 처녀', '동네 아저씨, 아줌마'다.
'내가 낸 세금으로 먹고 산다'며 행패를 부리는 납세자들을 보면서 많은 국세공무원들이 자괴감을 느낀다고 한다. 국세공무원들은 성난 납세자들의 '샌드백'이 되려고 국세청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 또한 납세자들이 내는 세금에 '맷값'은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매일 퇴근한 뒤 집으로 돌아와 '그만두고 싶다'며 남편을 붙잡고 눈물을 흘린다던 한 일선 세무서 여직원의 이야기가 머릿 속에 맴돈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시점이다.
비단 납세자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물질적인 성숙 뿐만 아니라 시민의식의 성숙도 함께 이루어가기를 소망해본다.
기획취재팀 : 이희정, 이현재, 류성철, 박지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