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적인 유교 문화는 사라지고 맞벌이를 해야 먹고 살 수 있으며 애완견이 가정의 중심을 차지하여 중년이 갈 곳이 없다. 침실(안방)은 부부방이라 하지만 사실상 아내의 공간이고, 작은 방들은 자녀들을 위한 공간이거나 방이 남아도 드레스룸 등 가족 공용 공간으로 사용하는 일이 많다. 그나마 남편에게 허락된 곳은 가족 모두가 사용하고 오픈된 거실이라 남편이자 아버지는 거실 소파에 누워 TV 리모컨을 만지작거리게 된다. TV도 아내나 애들이 드라마를 보겠다고 하면 동네 슈퍼로 나가거나 아파트 지하에 주차된 자동차로 간다.
충효사상을 중시하던 조선시대 양반가에는 사랑방이 있었다. 집안의 생활공간인 안채와 분리되어 집안의 어른인 가장이 주로 거처하던 곳으로 외부의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하던 곳이다. 사랑방은 외관상 정갈하고 소박한 느낌을 주지만 외부인이 주로 찾던 곳이었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수준 높은 책, 문방사우, 서화 등 상당한 비품들이 비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몇십 년 전 아파트가 많지 않던 시절에는 책상과 책장이 놓여 있는 서재가 있어 가장이 전용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사회는 변화하였으나 남자는 이따금 홀로이고 싶은 DNA가 흐르고 있다. 온전히 본인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원하지만 현대 사회는 중년 남성의 이런 욕구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집이 크지 않으면 남편이자 아버지만을 위한 공간이 없고, 옛날의 가부장적인 가족 분위기가 변모하여 지금의 아파트는 가족과 애완견이 공유하는 형태로 변하였다. 우울한 가장인 중년 남성을 위하여 최소한의 개인적 공간 확보가 필요한데 그 이유는 다음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다.
첫째, 개인 휴식의 베이스 캠프(base camp) 역할이다. 단순한 휴식의 공간을 넘어 심리적 안정감을 찾을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생계와 자녀 양육을 위하여 힘들게 버틴 하루를 돌아보고 휴식을 취하면서 내일을 위해 충전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은퇴한 사람이라면 가족을 위하여 평생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보지 못한 것에 대한 지난날의 성찰과 인생 이모작을 준비하는 역할도 할 수 있다. 애장품, 추억이 담긴 앨범, 서적, 컴퓨터 등 필요한 물품들을 비치하여 온전한 나만의 휴식 공간을 만들어 보자.
둘째, 명상(冥想)의 장소 역할이다. 하루하루 허덕이면서 살면 육체적인 휴식이 우선이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감에 따라 육체적인 휴식보다 정신적인 휴식이 더 필요하게 된다. 사회로부터 버림받아 용도폐기 된 느낌이 드는 은퇴자는 영적인 힐링과 명상을 통해 참된 자신을 찾을 필요가 있다. 바쁜 일상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불멍, 물멍, 산멍 등 ‘멍 때리기’가 유행인 것처럼 신중년은 나만의 공간에서 명상을 통하여 과거, 현재, 미래의 자기 재발견이 필요하다.
셋째, 가정용 평생학습 센터의 역할이다. 인생 전반전에 하지 못했던 일을 시작하는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악기연주, 그림그리기, 독서, 서예, 사진, 글쓰기 등 취미·여가 활동도 포함하여 하고 싶은 일을 하자. 은퇴 후 11만 시간을 활용하여 즐기다 보면 새로운 직업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백세시대는 인생다모작 시대이고 치매 예방을 위해서도 평생학습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으니 자신만의 가치를 새로 창조하는 가치창조센터를 만들 수 있다.
올해 103세인 김형석 교수는 저서 ‘백세를 살아보니’에서 인생의 가장 황금기는 60~75세이고 75세까지 인격적으로 성장한다고 강조하였다. 지금 신중년에게 필요한 것은 나만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집이 좁아 별도의 방을 할애할 수 없다면 TV와 소파가 점령하고 있는 거실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자. 가구를 재배치하고 폴딩 도어(folding door)를 설치하거나 천정까지 닿는 책장이나 합판을 이용하여 파티션(partition)을 만들면 적은 비용으로 공간을 만들 수 있다. 나만의 아지트를 만들어 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