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대비실명제를 지지하는 뜻있는 국민들은 조용하고, 경제단체와 기업들은 연일 반대의견을 표명하는 상황이라서 청와대의 반응이 매우 중요한 상황이었다. 청와대에서 반대입장을 표명한다면 내 의지만으로 밀어붙이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참으로 다행이었던 것은 온 사회가 접대비실명제를 두고 왈가왈부하는데도 노무현대통령과 청와대는 직접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내심 노무현정부는 혁신정부이기 때문에 청와대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일부에서는 접대비실명제가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혁신 철학과 부합하므로 어려움이 있더라도 밀어붙이라는 격려를 보내주었다. 대통령께서는 혁신가답게 오늘의 인기보다는 투명하고 건강한 내일을 보고 접대비실명제에 대한 전권을 국세청장인 내게 맡겨주신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감사하고 고마울 뿐이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결국 접대비실명제는 기획재정부가 연말에 법인세법 시행령에 근거규정을 만들어주고 우리 국세청이 2004년 1월4일 고시를 제정하여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시행 이후에도 폐지 요구나 건당 접대금액을 50만원에서 100만원으로 상향해달라는 건의는 계속됐다.
시행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접대비실명제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을 처음으로 듣는 자리가 마련됐다. 2004년 1월 7일 노무현대통령과 아침 조찬을 함께 했다. 하루 전날인 1월6일 오전에 1부속실 문용우 국장(3급)에게서 전화로 조찬연락이 왔다. 접대비실명제 시행 직후라서 질책성 말씀을 주실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하고 참석했다. 조찬에는 정찬용 인사수석이 배석했다.
그런데 대통령 첫마디는 매우 의외였다.
"접대비 실명제에 대해 시기가 부적절하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잘한 것으로 평가한다"면서 고생했다고 격려해주셨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진한 감동이 밀려오면서 그동안의 모든 애환이 한꺼번에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사실 나는 만약 대통령께서 접대비실명제 시행 연기나 완화 지시를 하면 다음 내용으로 대통령을 설득하려고 준비하고 참석했었다.
"대통령님! 작년부터 접대비실명제 시행얘기가 나왔지만 기업의 접대비 규모자체는 크게 감소하지 않아 소비에 미치는 영향은 걱정할 수준이 아닙니다, 그 대신 향락성 사교성 접대가 대중음식점 등의 실속접대로 바뀌면서 접대문화가 크게 개선되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성장잠재력을 확충하여 경제에 오히려 기여하는 효과가 클 것입니다. 혁신적인 참여정부가 해야 될 역사에 남는 일입니다. 경제계에서 어려움을 호소하더라도 국세청의 문제로 넘겨주시면 제가 반드시 성공시키겠습니다."
이날 이후 대통령께서는 외부에 접대비실명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 시작했다.
2004년 1월 15일, 대통령께서는 언론사 경제부장들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기업들의 접대비 논란과 관련하여 외부적으로는 사실상 처음으로 방향을 제시했다.
"접대비를 쓰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근거기록을 유지하자는 것이다. 경기에 큰 영향을 미칠 정도로 비중이 큰지 모르겠다. 그러나 기업회계의 투명성이 더 큰 가치 아니냐. 접대방식도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건강한 접대, 근거 있는 접대라면 기록이 가능할 것이고 건강하지 않은 접대나 투명하지 않은 접대는 기록이 어려울 것이다. 가치선택의 문제 아니냐. 투명성 건강성에 도움이 된다면 옳은 방향이다"
2004년 2월 23일, 대통령께서는 취임 1주년을 앞두고 제프리 존스 주한 미국 상공회의소 명예회장과 가진 매일경제신문 인터뷰에서 접대비실명제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셨다.
▶존스 = 접대비 50만원 제한으로 식당과 술집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데 이는 사실상 규제라기보다 투명성 강화조치다. 어떻게 보는가.
▶노 대통령= 그렇다. 우선 대통령이 지시한 일이 아니다. (웃음) 국세청 공무원들이 토론해서 '합시다'해서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규제가 아니고 초보적 원칙을 하나 더 확보해 나가는 것이다. 원칙 밖에 버려져 있는 것을 원칙의 경계선 안으로 하나 더 끌어들인 거라고 생각한다. 조심스럽게 원칙 바깥에 버려졌던 것을 원칙의 틀 안으로 끌어들인 정도로 생각한다.
사실 나는 접대비실명제 도입과 관련하여 대통령께 직접 보고를 드린 적이 없었다. 평소 대통령께서 법과 원칙 그리고 혁신을 중시하셨기 때문에 내심 접대비실명제는 대통령이 바라는 정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기위축 등 주변 여건이 접대비실명제 시행에 불리하게 전개되어 가고 있고 주로 접대를 받는 우리 사회지도층이란 분들이 취지는 좋지만 시점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하던 때여서 대통령께서 시기를 조절하거나 좀 유연하게 추진하라는 말씀을 하실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대통령께서 확실하게 접대비실명제 시행을 지지하는 말씀을 해주시면서 나로서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시행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대통령의 공개 지지발언으로 접대비실명제는 빠르게 안착되어 갔다.
그러나 또 한 번의 위기가 닥쳤다.
김진표 부총리에 이어 2004년 2월11일 취임한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취임 첫날 산하기관장들과의 상견례 자리에서 '건전하고 투명한 접대문화의 정착이라는 접대비실명제 도입 의도는 좋을지 몰라도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시행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했다'면서 국세청장을 질책했다는 내용이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이에 대해 참여연대 등에서는 '과연 업무 관련성도 밝히지 못할 정도의 향락성 접대비를 계속 방치하고 탈세도 모른척하면서 어떤 방법으로든 경제만 살리면 된다는 식의 위험스런 사고'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경제계와 반대편에서는 추진력이 강한 이헌재 부총리가 그렇게 비판했으니 접대비실명제가 폐지되거나 기준금액을 100만원으로 올리는 제도개선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다시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정치권 일부에서도 '접대비실명제는 이중규제다' '분산 편법결제 늘었다' '부작용이 많다' 는 등등의 지적을 계속했다.
그러나 나는 흔들리지 않고 뚝심 있게 시행해 나갔다. 이미 대통령이 바른 방향이라고 손까지 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세정개혁 차원에서 시민사회와 함께 마련한 제도를 시행한지 2개월도 되지 않아 손대는 것은 정책의 일관성과 신뢰성을 훼손하고 참여정부의 개혁의지 후퇴로 비춰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일부에서 접대 영수증 쪼개기 등 편법사례로 시행의 효과도 미미하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확실한 경고가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다음 회에서는 이명박정부의 접대비실명제 폐지와 제도 시행 5년간의 성과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