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단기 꼭짓점, 추격매수 자제 해야" 조언
서울 강남구 역삼동 D아파트 세입자인 주부 한모(30)씨는 최근 집을 사려고 돌아다녔던 지난 2주일이 마치 '악몽'과도 같았다.
추석 이후 집값이 오른다는 소식에 조급해진 한씨는 하루가 멀다하고 중개업소 문턱을 들락거렸지만 계약 직전에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그렇게 계약을 놓친 건이 모두 5번.
한씨가 처음 마음에 두었던 집은 서울 중구 신당동 남산타운 42평형이다. 집주인과 6억원에 흥정을 마치고 내집마련의 꿈에 부풀어있던 순간, 계약 당일에 집주인이 느닷없이 '안팔겠다'고 매물을 회수해버렸다. 이유는 "집값이 더 오를 것 같다"는 것. 나중에 알아보니 이 주인은 2천만원을 더 얹어 6억2천만원에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
별 수 없이 한씨는 다시 성동구 금호동 1차 푸르지오 31평형을 4억7천만원에 사기로 약속하고, 계약 장소로 나갔더니 집주인이 2천만원을 더 주지 않으면 안팔겠다고 했다.
이후 금호동 이수 브라운스톤1차, 마포구 밤섬현대, 마포구 경남아너스빌1차 등 분양권을 사려했지만 매번 계약 직전 집주인의 변심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불안감이 엄습해온 한씨는 외곽으로 빠지지 싶어 관악구 봉천동 푸르지오 32평형을 알아보니 '매물이 없다'며 연초 3억8천만원에 불과하던 아파트를 5억2천만원이나 달라고 했다.
5일 한씨는 "너무 어이가 없고 집값이 올라도 너무 올랐다는 생각에 사지 않겠다고 했다"며 "지금은 아예 주택 구입을 포기한 상태"라고 말했다.
내집마련 서민들의 한숨 소리가 커지고 있다. 서울, 수도권 곳곳의 아파트값이 1-2주일 만에 '억(원)'대가 뛰면서 주택시장에는 그야말로 '악' 소리가 터져나온다. 매물은 자취를 감춰 돈이 있어도 집을 살 수가 없는 형국이다.
다급해진 정부가 검단 등 신도시 발표에 이어 3일에도 부랴부랴 신도시 분양가 인하 방안을 발표했지만 아직까지 시장의 반응은 차갑기만 하다.
이번 주에도 아파트값은 서울, 수도권 모두 한 주만에 1% 이상 뛰며 발등에 불 떨어진 정부를 비웃었다.
전문가들은 "지금 집값은 '이상급등'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며 "추격매수를 자제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한다.
◇ 무섭게 오른 집값 '백약이 무효' = 부동산정보업체 부동산114 조사에 따르면 지난 주 아파트값은 서울 1.11%, 수도권이 1.26%나 뛰며 서울은 3년 1개월만에, 수도권은 2000년 이 업체가 시세조사를 시작한 이후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
지난 주 구리(1.93%), 김포(1.91%), 수원시(1.9%), 서울 강동(1.97%), 금천(1.78%), 강북(1.46%)등의 아파트값은 가히 '폭등' 수준이다. 특징은 강동구를 제외하고는 그동안 집값 상승대열에서 소외돼 있던 지역들이라는 점이다.
구리의 한 중개업소 사장은 "모두들 집을 사겠다고 난리인데 가물에 콩나듯 나오는 매물은 한달 전보다 1억원 이상 높은 게 대부분"라며 "가격 괴리가 커 발길을 돌리는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집값 불안은 지난 9월 전세난이 도화선이 됐다. 전세 물건 부족은 그동안 중소형 매매가 급등으로 이어졌고, 이후 파주 운정신도시 은평뉴타운의 고분양가 논란, 강북 도시재정비 촉진지구 지정 등으로 불안해진 시장에 판교신도시 낙첨자들이 대거 매수세에 합류하며 거래가 성사됐다.
지난 달 23일 추병직 건설교통부 장관의 '신도시 확대 공급' 발언은 불난 곳에 기름부은 꼴이 됐다.
인천 검단, 파주 등 신도시 예정지 주변은 물론이고, 과천, 안양, 남양주시 등 추가 신도시 후보지로 거론되는 지역까지 매물이 회수되고, 집값이 뛰고 있다.
공급 확대로 집값이 안정될 것이라는 정부 의도와 달리 시장은 정반대로 움직이고 있다.
연말 종합부동산세 고지서가 부과되고 내년부터 2주택자의 양도세가 중과되면 집값이 떨어질 것이라는 정부의 말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규제로 꽁꽁묶인 강남 재건축 아파트값이 뛰는 것은 정책 불신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개포동의 한 중개업소 사장은 "개발부담금, 기반시설부담금 등으로 수익성이 예전만 못한 게 분명한데도 집값이 뛰는 것은 국민들이 이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더이상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정권이 바뀌면 규제가 풀릴 것으로 기대하는 집주인들이 많다"고 말했다.
내년 대선정국도 집값 상승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하는 요인이다. 우리은행 안명숙 부동산팀장은 "대선을 앞두면 시중에 돈이 풀리고, 각종 개발공약과 경기부양책이 쏟아져 나온다. 집값이 안정되기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주택 수요자들은 불안심리가 극에 달해 완전히 공황 상태다. 위치, 평형 가리지 않고 매물이 있으면 무조건 기웃거린다. 집을 못사 안달난 사람들같다.
부동산퍼스트 곽창석 전무는 "지금 주택 구매자들은 투기꾼도 아니고, 부자들도 아닌 30대 중후반의 평범한 샐러리맨"이라며 "자고나면 집값이 오르고, 집 판 돈이나 전셋값으로는 아파트 문턱을 밟아보기도 어렵게 됐으니 조급증을 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3일 신도시 기반시설 설치비용을 국가가 분담하고, 용적률을 높여 분양가를 낮춰 주겠다는 정부의 '급처방'도 시장에서는 콧방귀를 끼고 있다.
용인시 수지읍의 한 중개업소 관계자는 "신도시 분양가가 얼마나 낮아질 지 아직 모르고, 공급을 늘리려해도 몇 년은 걸릴텐데 당장 집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답답한 공염불일 뿐"이라고 말했다.
◇ 집값 '단기 꼭짓점', 주택 구입 미뤄야 = 정부는 대책을 내놓는데 집값은 계속 오르니 집을 사려던 사람들도 '대혼란'에 빠졌다. 집을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가 안잡히는 것이다.
실수요자 입장에서는 신도시 입주가 본격화되는 2010년 이후 가격이 안정될 것이라는 정부 말만 믿고 무작정 기다리기도 불안하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지금의 상승세는 비정상적인 만큼 주택 구입시기도 미뤄야 한다고 조언한다. 일단 이달들어 강남 등 일부 시장에서 매수문의가 조금씩 줄고 있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
부동산114 김희선 전무는 "지금 집값은 오를만큼 올랐고, 버블 요소가 있어 보인다"며 "이달 들어 서울 강남권 등 인기지역의 고가 주택은 가격저항으로 매수세가 사라지는 분위기인 만큼 무리해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김 전무는 또 "세금 부담 느끼는 사람은 오히려 지금이 매도 타이밍인데 무리하게 욕심을 부려 매물을 회수하고 있는 것"며 "11-12월은 매수자가 줄면 매물이 나오고 가격 상승세도 멈출 것으로 예상돼 이 때를 노려 볼만하다"고 덧붙였다.
부동산퍼스트 곽창석 전무도 "지금 집값은 단기 꼭짓점에 도달했다"며 "다음 주부터는 집값 상승폭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돼 흥분을 가라앉히고 시장을 냉정하게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곽 전무는 "11월 중순이 지나면 내년 양도세 중과를 피하기 위한 막바지 매물이 분명히 나올 것"이라며 "자금 여유가 있으면 이런 물건을 연내 사는 것이 좋고, 여유가 없다면 1-2년 기다려도 된다"고 조언했다.
특히 수도권 아파트는 신도시 아파트 공급과 맞물려 앞으로 가격이 떨어질 수도 있어 추격 매수는 자제하는 게 좋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조언이다.
시간과공간 한광호 사장은 "10년 이상 장기투자 여력이 있는 사람은 재개발, 재건축이 가능한 단독, 연립주택 등도 관심을 가질 만하다"고 말했다.
스피드뱅크 박원갑 부사장은 "지금은 집값이 불안한 만큼 개발 예정지 인근 미분양이나 새 아파트 청약을 노리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반면 주택구입을 미룰 필요가 없다는 전문가들도 있다. 휴앤파트너스 박순신 사장은 "집값 상승세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겠지만 상승 추세는 지속될 것"이라며 "개발호재가 있는 곳은 하루라도 빨리 사는 게 좋다"고 말했다.
유앤알 박상언 대표도 "신도시 입주는 4-5년 후 벌어질 일이라 당장 집값에 영향을 미치진 않을 것"이라며 "보수적으로 접근할 필요는 있지만 내년 수도권 아파트 입주물량이 올해보다 감소하고, 대선도 끼어 있어 지금이라도 합리적인 가격에 사두는 게 좋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