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주(先主) 유비가 죽은 뒤 어린 황제 유선을 보필하며 나라의 운명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촉나라의 재상 제갈 양은 228년 위나라 정벌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출진에 앞서 제갈 양은 후주(後主) 유선에게 저 유명한 '출사표'를 바칩니다.
출사표는 국가의 장래를 걱정한 제갈 양의 진심을 담은 표문으로 고금의 명문(名文). 228년 제갈 양이 유선에게 바친 출사표의 마지막 문장에 '국궁진력(鞠躬盡力)'이라는 문구가 나오는 데 이 또한 유명한 문구로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제갈 양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모든 일을 미리 헤아려 살피기란 실로 어렵습니다. 신은 몸을 굽히어 돌보지 않고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국궁진력). 일을 이루고 못 이룸, 이롭고 해로움에 대해서는 미리 내다보는 데 밝지 못합니다"
1400여년의 시간이 흐른 뒤 청나라 황제 강희제는 국궁진력이라는 문구를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강희제는 무려 61년 동안 재위하며 자신의 좌우명을 몸소 실천한 황제입니다.
강희제는 오랜 재위기간 동안 청나라의 재정과 내정을 안정시키는 한편 활발한 정복활동을 통해 영토를 크게 확장, 만주족 출신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 중 한 명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2007년 국세청이 택한 또 하나의 단어-'국궁진력'=불의의 일격으로 낙마한 전군표 전 국세청장이 지난 해 취임하면서 내세운 국세행정 캐치프레이즈는 '따뜻한 세정'이었습니다.
이 말은 그 동안 국세행정을 상징하는 '대표어'처럼 사용됐습니다. 그러나 따뜻한 세정 전도사를 자임한 전 전 국세청장의 구속수감과 함께 생명력을 잃어버렸습니다.
현직 국세청장의 구속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로 위기상황에 직면한 국세청이 난국타개의 의지를 함축적으로 담아내기 위해 꺼내든 또 하나의 단어가 '국궁진력'입니다. 이 단어도 따뜻한 세정처럼 당분간 국세행정을 상징하는 대표어로 군림할 태세입니다.
국세청이 국궁진력이라는 단어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현재 국세청이 처한 위치와 이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그대로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국궁진력, '섬기는 마음으로 몸을 낮춰 온힘을 다한다' 즉, 현직 국세청장의 구속으로 신뢰가 땅에 떨어진 국세청으로서는 초심으로 돌아가 몸을 바짝 엎드린 채 각고의 자정노력과 본연의 업무에 충실히 임해야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지요.
국세청은 국궁진력이라는 단어를 선택하면서 좋은 의미만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국궁진력이라는 사자성어는 좋은 의미에도 불구, (대만에서)부정부패를 일삼는 정치인들이 재기를 위해 유권자들에게 써먹는 말이기도 합니다.
한상률 차장 자신이 "말 뿐이 아닌 행동으로 (국민들에게)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처럼 국세청이 제대로 된 자정노력을 하지 않거나 겉으로 보이는 '안정'만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국민들은 분명 국궁진력의 의미를 아름다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것입니다.
□ 에필로그, '국궁진력'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8일 오전 10시 지방청장 회의를 소집, 국세청이 반성하는 모습과 흔들리지 않고 업무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로 한 한상률 국세청 차장은 밤늦도록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한 차장의 고민은 국세청이 처한 현재의 위치와 앞으로 나아가야 할 태도를 함축적으로 보여줄 적당한 문구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한 차장은 "밤 늦도록 고민을 했지만 딱 부러지게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고 회상했습니다. 8일 새벽 4시, 선잠에서 깨어난 한 차장의 뇌리에 번개처럼 '국궁진력'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고 합니다.
한 차장은 "지금 이 같은 시기에 우리가(국세청이) 지켜야 할 자세가 '국궁진력'의 자세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이 날 기자들에게 배포한 보도자료에도 굵은 글씨로 표기되어 나왔습니다.
지방청장 회의 말미에도 한 차장은 컴퓨터 화면에 강희제의 사진과 국궁진력의 의미를 적은 화면을 간부들에게 보여주며 고사에 얽힌 이야기를 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간부들에게 "이 말에 담긴 의미를 새겨 열심히 업무에 매진해 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고 합니다.
남은 것은 한 차장이 고심 끝에 생각해낸 국궁진력이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를 국세청이 얼마만큼 수행하느냐 입니다. 제대로 된 '행동'이 없다면 아마도 '말의 성찬'쯤으로 치부되어 버릴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