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가는 세계 최대의 원유 소비국인 미국의 경기침체 우려가 심화되면서 1월 말에 배럴 당 90달러선이 무너지기도 했지만 이후 미 경제상황이 의미 있는 호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음에도 사상 처음으로 배럴 당 110달러를 넘어서는 초강세를 유지하고 있다.
12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의 4월 인도분 서부 텍사스 중질유(WTI)는 지난 1983년 원유 선물거래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배럴 당 110달러를 넘어 110.20달러를 기록하는 초강세를 나타낸 끝에 배럴 당 109.92달러로 거래를 마감, 종가 기준 사상 최고치도 갈아치웠다.
WTI 가격은 지난 1년 사이에 무려 86%나 급등하면서 이미 인플레이션을 감안한 역대 최고치인 1980년 '오일 쇼크' 당시의 103.76달러(당시 가격은 38달러)를 훌쩍 뛰어넘어 유가 수준만 보면 이미 오일쇼크 상황에 온 셈이다.
영국 런던 ICE 선물시장에서 거래되는 4월 인도분 북해산 브렌트유 역시 배럴 당 106.40달러까지 치솟으면서 역시 신고가 행진 중이다.
이에 대해 시장 분석가들은 수급과 같은 펀더멘털로는 현재의 유가 움직임을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최근의 유가 급등세는 미국의 추가 금리 인하 기대감으로 주요 통화에 대한 달러화의 가치가 급락세를 나타내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펀더멘털이 아니라 달러의 움직임에 따라 유가가 결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경기침체에 빠지지 않기 위해 통화당국이 잇따라 금리 인하에 나서면서 달러화 가치가 연일 추락하자 상대적으로 강세를 보이고 있는 통화를 가진 투자자들이 원유시장에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달러 가치 추가하락 기대감과 인플레 우려에 대한 헤지 욕구가 유가를 끌어올리고 있는 상황에서 투기적인 자본까지 가세하면서 원유시장이 유가 하락요인보다는 상승요인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일각에서는 WTI와 북해산 브렌트유의 가격차이가 4달러 가까이 벌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뉴욕시장에 투기적 수요가 집중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실제 원유가 필요한 정유업계 등이 유가의 하락에 베팅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투기자금과 대형 투자펀드가 유가 상승 가능성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수급 이외의 요인으로 인해 국제유가가 움직이면서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증산에 나설 이유도 마땅치 않아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달러화의 움직임이 국제유가를 결정하는 상황이 이어질 가능성이 큰 것으로 많은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주요 통화에 대한 달러화의 가치는 전날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긴급 유동공급 발표에 힘입어 반짝 상승세를 보였으나 유럽중앙은행(ECB)이 금리 인하 가능성 배제를 시사하면서 다시 급등세로 돌아섰다.
이날 뉴욕 외환시장에서 달러화는 유로화에 대해 1.5526달러까지 가치가 추락하면서 지난 1999년 유로화 도입 이후 최저치를 갈아치웠다.
또한 오는 18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추가 금리 인하 결정이 기정 사실화되면서 달러화 가치의 추가 하락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국제유가의 급등세가 지속하면서 올해 유가 전망도 속속 상향조정되고 있다.
리먼브라더스는 최근 올해 1분기 WTI 평균 가격 전망치를 배럴 당 93달러로 이전 전망치에 비해 7달러를 상향조정했다.
골드만삭스 역시 유가 평균치를 올해 95달러, 내년 105달러, 2010년 110달러로 올리는 한편 원유 공급 증가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미국 경제성장이 회복되거나 원유 공급에 중대한 차질이 발생할 경우 유가는 배럴당 150~200달러에 달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전문가들은 물론 단기간에 배럴 당 20달러 넘게 급등한 데 대한 부담감과 여전한 미국경제의 침체 가능성, 계절적 비수기 진입 등 유가를 다시 끌어내릴 수 있는 요인들도 많이 있지만 적어도 현재의 시장 분위기를 유가 강세론자들이 주도하고 있는 것 만큼은 분명하다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