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행복이 '사라진' 채 오직 지독한 절망만이 허락됐던 우리 가족에게 조금씩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샘솟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열심히 일하고, 가족들이 열심히 절약한 덕분에 우리 가족은 두 칸 방 전셋집에서 방 두 칸짜리 집을 사서 이사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당신이 불철주야 열심히 일하고 가족들이 그 고생을 감내한 덕분이라고 말했지만, 당시 어머니와 밤낮으로 교회에 다녔던 나는 어머니의 그 눈물 어린 기도가 가족 모두에게 큰 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당장의 형편이 조금 나아진 것뿐이지, 우리 가족은 여전히 생활고에 시달렸다. 당시 나는 학교에 가기가 좀 두려웠다. 공부가 싫다거나 숙제를 하지 않아 선생님께 혼이 날까 봐 그랬던 게 아니었다. 나는 반에서 제법 공부를 잘하는 축에 속했지만 학업과는 상관없는 일로 늘 선생님으로부터 호출을 받아야만 했다. 제때 학비를 내지 못해 교무실에 불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조용근! 수업 끝나고 교무실로 와. 너만 학비를 안 낸 거 알아 몰라?"
선생님이 나를 호출할 때마다 친구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했다. 모두가 나를 비웃는 것 같아 몹시 괴로웠다. 그럴수록 더더욱 다른 아이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대성초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집에서 4km나 떨어진 경상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매일 걸어 다녔다. 왕복 8km에 달하는 거리였다. 제대로 먹은 것도 없이 매일 8km나 되는 거리를 걸어 다니는 일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초등학교에 이어 중학교 3년 동안 하루도 결석하지 않고 통학해 3년 개근상을 받을 만큼 악착같이 공부했다.
중학교 졸업식 때에는 내가 졸업생을 대표해서 답사(答辭)까지 했다. 그 장면을 보신 어머니는 한없이 우셨다. 아들에게 해준 것이 없었는데도 장한 아들이라 생각하시고······.
중학교를 졸업하기 1년 전쯤의 어느 날, 아버지가 다니는 직물공장 사장 아들이 경북사대부고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당시 경북사대부고는 대구에서 알아주는 수재들만 들어간다는 지역 명문 국립(國立)고등학교였다. 경북사대부고 출신들이 숫자는 적었지만 서울대를 비롯한 명문대 합격자들이 많아서였기 때문이었다.
◆…1962년 경상중학교 3-6반
직물공장 사장은 아들이 대구지역 명문 고등학교인 경북사대부고에 합격했다며, 주위 사람들을 초대해 큰 잔치를 벌였다. 아버지는 그 잔치에 초대되어 다녀온 이후로 늘 풀이 죽어 있었다. 아버지 역시 당신의 아들이 경북사대부고에 합격해 공장 사장처럼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던 것 같았다.
하루는 형이 조용히 나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용근아. 아부지는 우리 중 하나가 경북사대부고에 진학하기를 원하시는 거 같데이. 이 형아는 이미 틀려서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 드릴 수 없으니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봐야 하는 니가 한 번 도전해 보그래이. 니라면 아버지의 소원을 꼭 들어 드릴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이."
형은 나에게 은근히 압력을 가했다. 꼭 형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 역시 아버지가 그토록 원하시는 경북사대부고에 입학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학교 성적이 좋았던 나는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 드리기 위해 그때부터 경북사대부고를 목표로 좀 더 열심히 학업에 매진했다.
학교 공부 못지않게 교회 생활도 열심히 했다. 중등부 회장을 맡고 있었던 나는 늘 기도 첫머리에 경북사대부고에 가고 싶은 나의 간절한 소원을 고백했고, 평소보다 더욱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일날은 공부를 쉬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기도를 드리면서 준비하기를 여러 날. 드디어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보는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시험 날 아침은 유난히 추웠다. 아버지는 공장으로 출근하기 전, 가방을 싸고 있던 내 머리를 어루만지시더니 조용히 말씀하셨다.
"나는 니가 그동안 묵묵히 노력해 온 것을 믿고 있다이, 최선을 다해서 시험 치고 오너라."
아버지는 말이 끝난 후 내 손을 꼭 잡고는 휙 하니 집을 나섰다. 옆에서 물끄러미 내 모습을 지켜보고 계시던 어머니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집을 나서는 내 손을 꼭 잡으셨다.
"하나님 아부지, 내 새끼 용근이를 잘 부탁합니데이. 그저 불쌍히 여기어 주이소, 아멘."
아버지의 격려와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긴장되어 있던 내 마음을 자연스럽게 풀어 주었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시험장으로 향했다.
시험을 끝마치고, 며칠이 지나 드디어 합격자 발표를 하는 날이 되었다. 나는 다소 긴장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학교로 향했다. 교실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셨다.
"조용근!"
나를 부르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합격이다!"
선생님이 합격이라는 말을 하는 순간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늘 내 이름은 학비를 내지 않아 호명되는 '조용근'이었다. 이렇게 극적인 순간에 '조용근'이 호명되는 건 길지 않은 내 인생에 있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와아!"
함께 교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반 친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여기저기에서 친구들이 달려들며 함께 기뻐해 주었다.
학교를 마치자마자 한걸음에 아버지가 일하고 있는 공장으로 달려갔다. 아버지는 숨을 몰아쉬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나를 보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아부지, 아부지! 지가 경북사대부고에 합격했습니더. 경북사대부고에."
"뭐라꼬? 니가 정말이가?"
아버지는 나를 끌어안고는 눈물을 흘리며 연신 "장하다이, 내 아들. 내 아들 조용근 니가 장하다이!"라고 외치며 내 손을 잡아끌고는 곧장 사장실로 달려갔다.
"사장님예! 임마가, 내 아들놈도 경북사대부고에 합격했습니더. 거기가 사장님 아들이 다니는 학교가 맞지예?"
"여보게, 용근이 아부지. 이게 어디 자네 집안만의 경산가. 우리 공장에서 명문 고등학교인 경북사대부고 출신이 둘이나 나온 게 아닌가. 잘했네. 내 이런 경사에 가만히 있을 수 있나."
그는 마치 당신 자식이 합격한 것처럼 기뻐하며 말을 이었다.
"용근아. 내가 니 입학금과 첫 등록금을 너거 아버지에게 보너스로 줄끼다."
◆…1965년 경북사대부고 3-2반 급우들과 함께(앞열 오른쪽에서 2번째)
아버지는 사장의 말에 놀란 토끼 눈을 하며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는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사장도 덩달아 기뻐하며 공장은 마치 축제가 벌어진 것처럼 몇 시간 동안 들썩였다.
공장 사장에게 특별 외출을 허락받은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무작정 집으로 뛰어갔다. 집에 도착해 보니 어머니와 형, 누나가 집 밖에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모양이었다.
"하나님 아부지, 감사합니더. 감사합니더."
어머니는 나를 꼭 안고서 연신 눈물을 흘리며 감사 기도를 드렸다. 형과 누나도 여동생들도 축하한다며 함께 기뻐해 주었다.
우리 가족이 그렇게 모두 기뻐하며 활짝 웃은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지만, 그 당시는 앞으로 다가올 어려움도 잠시 잊고 오랜만에 온 가족이 마음껏 활짝 웃었던 것 같다. 그때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마치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다. 늘 굳어 있던 아버지 얼굴에 그날처럼 화사한 웃음이 그득했던 날이 언제 또 있었는지······.
그러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합격의 기쁨은 잠시뿐, 더 큰 어려움과 좌절의 시간이 그리 멀지 않은 길목에서 우리 가족을 기다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