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적 통일비용 제쳐둔 통일 논의는 무의미"
전문가 "부가가치세 1-2% 인상 통일재원 확보"
연초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대박론' 구상에 이어 통일준비위원회 출범으로 통일 논의가 활발해졌다. 그러나 정작 핵심인 천문학적인 통일비용 문제는 뒷전에 밀리면서 현실성이 떨어지고 있다.
국내외 연구기관들은 통일이후 20년간 3000조원 이상의 통일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우리 경제규모에 이런 천문학적인 비용을 제쳐둔 통일 논의는 국민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정치적인 퍼포먼스에 불과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1년 세입예산 350조원 수준에 만성적인 관리재정적자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는 현재의 국가재정으로는 이만 한 돈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는 통일 비용을 충당하고도 남을 수준의 획기적인 조세개혁이 이루어지지 않고는 통일은 '공염불'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 국내외 전문가, 통일비용 546조~5000조원 추정 = 최근 현대경제연구원이 일반국민 814명, 전문가 105명 등 9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 일반국민 78.0%와 전문가 98.1%가 통일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또 통일에 따른 경제적 편익 역시 국민 67.0%와 전문가 98.1%가 우리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응답해 통일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처럼 통일 필요성과 편익에 대해서는 국민 대다수가 공감하고 있지만 문제는 '돈'이다.
통일비용을 우리 국가재정으로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청사진을 마련하는 작업이 절실하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국내외 전문기관들은 통일방식과 비용에 대한 정의, 비용 투입기간 등에 따라 적게는 546조원에서 5000조원까지 다양하게 통일비용을 제시했다.
국내 경제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통일이후 약 20여년 간 무려 3500조원이라는 천문학적 재원이 필요하다는 분석도 나왔다. 이는 앞서 통일을 경험한 독일이 통일이후 20년 동안 약 3000조원을 썼다는 점을 감안한 분석이었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은 통일이후 10년간 매년 국내총생산(GDP)의 7~12%가 소요될 것으로 추산했다. 피터백 연구소는 향후 30년간 최대 5조 달러(한화 약 5000조원), 통일연구원도 최대 3277조원이 필요할 것으로 전망했다.
문제는 이처럼 막대한 자금이 투입될 통일비용에 대해 정부는 현재까지 그 대비책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 텅 빈 '통일항아리'… 통일계정 신설안 2년 넘도록 쿨쿨 = 만성적인 재정적자로 정부의 곳간은 텅 비어 있고, 이를 충당하기 위한 국가부채는 매년 증가하는 상황에서 막대한 통일비용을 감당할 여력이 있는 지도 의문이다.
기획재정부의 지난 7월 재정동향보고서에 따르면 2009년 이후 올해 5월까지 통합재정수지에서 4대 사회보장성기금수지를 제외한 관리재정수지는 적게는 13조원, 많게는 43조원의 적자가 매년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의 순(純)재정상황을 보여주는 지표인 관리재정수지가 이 모양새다 보니 국가부채 또한 2009년 346조1000억원에서 지난 5월말 현재 490조7000원으로 무려 150조원 가까이 불어난 상태다.
게다가 500조원이 넘는 공공기관 부채까지 감안하면 한국은 통일비용을 감당할 여력이 없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여기에다 지난 이명박 정부에서 추진했던 현행 남북협력기금에 적립성 통일계정(통일항아리)을 신설하려던 남북협력기금법 개정안조차 2년 넘도록 표류하고 있다.
당시 이 구상은 매년 1조원 이상의 예산이 배정되는 남북협력기금의 집행률이 저조해 상당수의 기금이 국고로 반납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한 '궁여지책'이었다.
통일부에 따르면 2007년 78.2%에 달했던 남북협력기금 집행률이 2008년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남북관계 경색으로 급감하기 시작, 매년 1조원 가량이 불용되고 있다. 올해 상반기까지도 1조1132억원의 기금 중 2.1%에 불과한 238억원이 집행됐다.
정부는 이 불용액을 '통일항아리'라는 특별계정에 적립하고 여기에 민간·정부의 출연금, 기타 전입금 등을 포함시켜 향후 20년간 55조원 가량의 통일비용을 적립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그나마 관련 기금법이 국회에 묶이면서 지금은 잊혀진 상태라는 것이 통일부 관계자의 설명이다.
설령 이 법안이 통과돼 적립된다 하더라도 예상되는 통일비용에는 턱없이 못미친다.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통일 논의와 재원대책 상황만 놓고 볼때 어쩌면 우리는 머리로만 통일을 바란채, 현실에서는 통일을 애써 밀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부가가치세 인상카드는 통일 대비해 아껴야" = 통일에 대비한 재원마련은 피할 수 없는 과제다. 특히 독일 통일 당시의 동·서독의 경우보다 더 큰 격차를 보이고 있는 남북한의 경제 여건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따라서 어떤 방식으로 통일재원을 마련할 것인지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
북한의 체제가 언제까지 유지될지 모르지만 어느 시점에 갑작스럽게 무너져 내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 통일비용 마련의 필요성은 현재의 남북관계 경색과는 별개로 접근할 당위성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대다수 전문가들은 정부의 만성적 적자재정, 490조원에 달하는 국가 부채, 여기에 500조원 이상의 공공부문 부채 등을 감안하면 막대한 규모의 통일비용 마련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증세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입을 모은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통일비용 마련을 위한 '통일세' 추진을 검토하기도 했다. 당시 새누리당 김충환 의원은 직접세 형태인 독일의 연대특별세 방식을 토대로 한 통일세 신설 입법안을 지난 18대 국회에 제출한 바 있다.
하지만 직접세 방식의 증세는 조세저항이 큰 것이 문제다. 일부 전문가 사이에서 부가가치세율를 인상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조세저항 강도가 직접세보다는 낮고, 세율 1∼2% 인상으로도 상당규모의 세수확보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 오늘을 살아가기도 벅찬 마당에 언제 올지도 모를 통일에 대비해 호주머니를 터는 것은 통일세에 대한 공감대를 얻어내는데 장해가 될 것만은 틀림없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점을 감안해 "조세개혁이 이뤄지더라도 부가세 인상 카드는 통일에 대비해 아껴둬야 한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기획재정부 고위 관계자는 "통일재원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 경제상황 등을 고려할 때 증세를 논할 단계는 아니다"며 "먼저 북한과 통일을 어떻게 접근 할 것인지를 해결하고 난 후에 준비해도 늦지 않다"는 의견을 보였다.
이제 통일은 그 시기가 언제이든 해결해야 할 숙제고 그에 따른 통일재원 마련은 좋든 싫든 준비를 해야 할 과제다. 따라서 세제개혁도 통일에 대비한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