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되어야 할 소중한 한국의 자본이 해외로 줄줄 새나가고 있다.
영국 조세정의 네트워크은 한국을 조세회피 세계 3위국에 랭크시켰다. 중국과 러시아 다음이다.
우리나라에서 조세회피처로 옮겨간 자산만 870조원 규모에 달하며 이 중 대부분이 음성적방법을 통해 흘러나간 돈이라는 분석을 덧붙였다.
정상적인 경제활동이라고 다를 바 없다.
지난해 국제수지표상 해외직접투자는 236억 달러인데 비해 외국인직접투자는 50억 달러에 불과했다. 국내로 들어온 돈보다 해외로 나간 돈이 5배 가량 많았다. 한국자본의 '엑소더스(Exodus) 현상'을 대변해주고 있는 지표다.
미국 독일 영국 등 선진국들은 자본이탈을 막기 위해 지속적으로 법인세를 인하하며 기업들에게 유인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법인세 인상 논란에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기업경쟁력 확보를 위해 지원하는 각종 세제혜택을 줄이는 실질적 증세작업에 속도를 더해가고 있다. 자본이 국내에 머물 좋은 환경을 훼손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판국에 정부는 조세피난처를 활용한 역외탈세를 막는데 세무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 해외자본을 유치하고 국내자본의 이탈을 방지하는데 필요한 '당근'은 없고 '채찍'만 휘두르고 있다.
그 결과 지난해 조세회피처에 페이퍼컴퍼니를 둔 한국인은 272명으로 대기업 전·현직 임원, 금융인, 부동산업자 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한다고 한 인터넷 언론이 공개했다. 케이만군도, 버진아일랜드 등 10대 조세회피처에 주소지를 둔 법인도 86개사나 됐다.
한국조세제정연구원도 1980년부터 2012년까지 우리나라에서 불법유출된 자본은 160조 8000억∼269조1000억원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2012년 한 해만도 최소 6조원에서 최대 24조3000억원이 불법유출됐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올해 정부당국에 신고된 해외금융계좌 금액은 조세회피처를 포함해 24조원에 불과했다.
□ 국경 없어진 자본이동… 세금 피해 바다 건넌다 = WTO(세계무역기구)체제 이후 자본의 이동이 자유로워지면서 자본의 국경이 급속히 무너지고 있다. 이에 따라 돈은 금리와 환율을 따라 이동하고 자본은 낮은 세율을 좇아 이전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미국 패스트푸드업체 버거킹은 최근 "캐나다 커피체인점 팀호튼과 인수합병을 논의 중이며 본사를 캐나다로 옮길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유는 한 가지. 높은 법인세를 회피하기 위해서다.
미국의 법인세율이 35%인 반면 캐나다는 15%로 지방세를 포함해도 25%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세율이 10%p나 차이나 세금절감 효과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버거킹과 같이 높은 법인세를 피해 본사를 해외로 옮기려는 미국기업이 25개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한국의 기업들은 본사를 해외로 옮기진 않지만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하거나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하는 방식을 주로 쓰고 있다.
삼성전자가 베트남의 옌퐁공단에 세계 최대 규모의 휴대폰 생산기지를 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곳에 생산기지를 설치한 이유는 많지만 베트남 정부의 유인책이 한몫을 했다.
베트남 정부는 22%인 법인세를 삼성에는 첫 4년간 면제해주고 그 후 46년 동안 5~10%만 매기기로 했다. 공장에 세관을 세워 수출용 휴대폰은 공장에서 통관절차를 밟는 특혜도 부여했다. 이 정도 유인책을 마다할 기업은 없다는 것이 재계의 시각이다.
조세피난처로 달려가는 기업의 경우 기업경쟁력 확보를 위해 불가피한 경우가 많다.
한 중견 IT기업은 핵심기술 이전이 절실해 작년 케이만제도에 SPC(특수목적법인)를 설립하고 해외 IT연구회사의 경영권을 취득했다. 이 회사는 자체자금만으로는 경영권을 확보하기 어려워 국제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모으기 위해 케이만제도로 달려갔다.
해운업계의 경우 페이퍼컴퍼니 활용은 관행이 됐다.
해운회사들은 조세피난처인 파나마에 선박 1척 마다 회사 하나씩을 설립해 놓고 있다. 고가의 선박을 구매하기 위한 선박금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해운회사 입장에서는 선박을 직접 구입할 경우 회계상 부채로 잡혀 유동성 확보나 리스크 관리가 어렵다"며 "해외 SPC를 설립하여 선박을 보유하는 것은 대주사와 해운회사 입장에서 모두 득이 된다"고 설명했다.
선박을 취득할 때 내는 취·등록세 비용 절감효과도 상당하다.
아예 조세피난처에 법인을 보유하는 경우도 있다.
기관투자자들이 국내 투자신탁을 이용해 해외에 투자하는 경우나 연기금, 한국투자공사 등 기관들이 해외에 투자할 때도 룩셈부르크 등에 SPC(특수목적법인)를 설립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홍성일 전경련 조세금융팀장은 "미국·영국 등 일부 국가의 경우 외국인이 자국 부동산을 매입하면 자국에 사업장이 있는 것으로 간주해 세금을 징수하고 있어 이를 피하기 위해 SPC를 설립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기업들 '한국 엑소더스' 경고에도 정부·국회는 '모르쇠' = 기업 본사의 해외 이전은 이제 미국·유럽 등 먼 나라의 문제만은 아니다. 재계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업들의 '한국 엑소더스'를 경고하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이 기업규제책을 강화해 경영환경이 불투명해지면 한국 이탈 현상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경우 기업의 제조기반이 해외로 나가는 만큼 국내 투자와 고용환경이 악화되고 결과적으로는 세수기반이 약화되는 악순환이 일어나게 된다.
한국 기업이 해외 이전에 나서는 요인 가운데 기업의 세부담이 차지하는 비중은 만만치가 않다.
전 세계적으로 법인세 부담을 늘리자는 논의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나라만 법인세 증세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보니 기업들의 투자의욕을 꺾고 있다.
현진권 자유경제원장은 "정부는 증세가 없다고 하지만 비과세 및 감면 폐지로 실질적인 증세가 이뤄지고 있어 이에 따른 기업투자 감소 및 경제성장률 저하가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수년전 대기업을 따라 해외로 나간 한 제조업체는 아예 생산시설 전부를 해외로 이전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각종 세제혜택을 누리고 있는 데다 골치 아픈 노사관계도 없어 큰 이익을 보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국내에서는 세금이나 인건비 등 원가절감에 한계가 있지만 해외로 눈을 돌리면 생산성까지 만족스럽다는 것이 이 회사의 판단이다.
국내 수출기업들의 해외이전은 해외시장 개척을 위한 도전으로 반길만한 일이나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높은 세금부담을 피하려는 '탈출'의 의도 큰 경우도 있다.
이렇게 한 번 생산기지를 이전한 기업들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조건이 더 나은 국가로 이동하게 마련이다. 그만큼 한국을 떠나는 자본이 심각하다는 말이다.
전경련이 매출 상위 10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기업 164개 중 국내 U턴을 고려하는 기업은 1개에 불과했다.
전경련은 한국경제의 엑소더스가 우려되는 7가지 징후로 △역주행하는 증세논의 △과도한 기업규제 △단가인하 금지로 해외로의 거래선 변경 유인 증가 △급격한 엔저로 해외생산 기지 확대 우려 △높은 생산요소 비용 △반기업 정서 확산 △경직된 노사관계 등을 꼽았다.
영국 미국 북유럽 등 선진국들이 기업경쟁력 제고를 위해 법인세를 인하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는 정치권에서 법인세율 인상을 주장하는 의견이 만만찮아 재계의 시름은 깊어지고 있다.
□ 재계 "사내유보금 과세하겠다는 정부 믿고 투자하겠나" = 미국의 경우 최근 해외에서 공장을 옮겨오는 기업에 세제혜택은 물론 각종 인센티브를 약속하고 나섰다.
오바마 정부는 법인세 상한선을 35%에서 28%로 낮추고 제조업체의 경우 25%의 특별 세율을 적용받도록 했다. 자동차 산업에 대해서는 620억달러(64조원)의 구제금융을 지원하기도 했다.
기아차가 미국에 진출할 때 각 주정부는 앞 다퉈 좋은 혜택을 제시, 15개나 되는 자동차회사들이 미국에 공장을 건설했다.
경제활성화를 위한 오바마 정부의 과감한 개혁이 가져온 결과다.
독일도 제조기반 강화 정책들을 실시하며 적극적으로 기업 규제를 줄여나가고 있다.
임금이나 높은 지대 등 높은 생산비용으로 기업들이 해외로 빠져나가자 세율을 대폭 낮추고 기업지원정책을 펴 기업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덕분에 2000년대 초반 11.6%까지 치솟았던 실업율도 2010년에는 7.1%로 줄어들었다.
신흥국들까지 해외기업 유치를 위한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제조업, IT, 바이오 기술 등 해외기업 생산기지 이전을 위한 맞춤형 인센티브를 지급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은 자국 기업을 해외로 내몰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기업으로부터 나온다.
성장률은 답보상태인데 통상임금 확대로 인건비가 10% 이상 늘려야 할 판에 사내유보금에 과세하겠다고 나서는 정부를 믿고 투자할 기업은 없다는 게 재계의 목소리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요 지방자치단체들이 새만금간척지 등의 해외기업유치에 나선다는 게 넌센스라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해외 기업 유치에만 공을 들일 게 아니라 한국 기업의 국내 투자도 해외 기업 유치와 같은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며 "특혜 시비에 지레 겁먹을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투자 유치에 나서야 국내 경제 활성화가 앞당겨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 국민이나 우리나라 법인의 해외진출로 인해 해외에서 발생하는 세금문제를 어떻게 규율할 것인가에 관해 입법적 검토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의 정승영 박사는 "일부 국가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과도하게 세금을 징수하거나 외국인에게 까다로운 규제를 적용하는 경우 이를 피하기 위해 조세피난처를 활용하는 게 국제관례"라며 "우리 기업들만 조세피난처를 활용하지 못할 경우 경쟁력에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최근 조세피난처에 있는 법인을 무조건 탈세의 온상으로 보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기업들이 정상적인 사업활동에 지장을 받지나 않을까 걱정이 많다"고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