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대 미국 대통령을 뽑는 대선이 50일 이내로 다가왔다. 7월 전당대회이후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후보를 압도하던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대세론'은 지난 5일 노동절을 전후해 사실상 백중세로 돌아섰다. 여론조사 기관에 따라 앞선 후보가 뒤바뀌는 대혼전 양상을 보이고 있다.
클린턴의 발목을 잡아온 '이메일 스캔들'이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데다 그녀의 가족자선재단인 클린턴재단과 국무부 간 유착 의혹, 트럼프 지지자 절반이 '구제불능 집단'이란 발언의 후폭풍, 폐렴으로 휘청거린 '건강 이슈' 등 새로운 악재들이 쏟아진 탓이다.
지난 17일에 나온 LA타임즈와 서던켈리포니아대학 공동조사에서 트럼프는 47%의 지지율로 클린턴을 6%포인트 앞섰다. 폭스뉴스도 양자대결에서 트럼프가 1%포인트 앞서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반면 뉴욕타임스와 CBS 공동조사에서는 클린턴이 46%로 트럼프를 2%포인트 앞섰고 퀴니피액대 조사에서는 클린턴이 5%포인트 우세를 보였다.
여론조사평균치를 집계하는 '리얼클리어폴리틱스'가 같은 날 내놓은 수치는 클린턴 45.7%, 트럼프 44.2%로 격차가 1.5%포인트로 좁혀졌다. 뉴욕타임스도 클린턴의 당선가능성을 89%에서 73%(18일 현재)로 낮췄다. 전체적으로 클린턴이 앞서고 있지만 흐름은 트럼프가 상승세다.
하지만 주요 예측기관들은 지금도 클린턴의 당선가능성을 높게 본다. 선거인단 수가 많은 큰 주(州)에서 클린턴이 우세하기 때문이다. 미국 대선은 전국 50개 주에 인구비례로 할당된 선거인단(총 538명)을 주별 유권자투표 승자가 모두 가져가, 과반(270명) 득표자가 승리하는 방식이다.
민주당은 텃밭 19개주를 확보하고 있다. 지난 1992~2012년 사이 치러진 여섯 번의 대선에서 민주당은 18개 주와 콜롬비아특별구에서 매번 승리를 거두었다. 이들 텃밭에서 챙길 수 있는 선거인단은 242표나 된다.
반면 1992년 이래 공화당은 13개 주에서 매번 승리를 거두었다. 여기서 얻은 선거인단 수는 민주당에 훨씬 못 미치는 102표에 불과하다. 워싱턴포스트는 판세조사 보도에서 클린턴이 244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했으며 11개 경합주 가운데 플로리다 한 곳만 추가해도 승리할 것으로 예측했다.
사실 구도로 보면 미국대선은 '끝난 게임'이었다. 민주당진영은 현직 대통령·부통령에다 소수인종, 무슬림, 동성애자까지 모두 클린턴 대통령 만들기에 일사불란하다.
반면 공화당은 지금도 분열돼 있다. 부시 가문과 밋 롬니 등 구주류가 이탈했고 당 지도부(폴 라이언)와 원로그룹(존 매케인)은 트럼프를 내켜하지 않고 있다. 대선과 함께 치러지는 총선에서 함께 패배하지 않기 위해 트럼프와 일부러 거리를 두려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게다가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CNN 등 주류 언론들은 '트럼프 당선은 곧 미국 몰락'의 메시지를 주입하며 트럼프 무너뜨리기에 안간힘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런 유리한 구도에도 불구하고 클린턴이 트럼프를 계속 압도적으로 앞서지 못하고 박빙세로 추격을 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동안 클린턴이 두 자릿수로 격차를 벌린 여론조사도 이어졌었다. 하지만 이는 클린턴이 이슈를 주도했다거나 열정적인 지지표에서 트럼프를 앞섰기 때문이 아니고 스스로 무덤을 판 '트럼프의 입' 때문에 클린턴이 반사이익을 얻은 측면이 컸었다. 반사이익만으론 대선 승리는 보장되지 않는다.
앞으로의 판세는 그야말로 예측불허다. 3차례 TV토론과 클린턴의 건강 이슈의 폭발성 때문이다. TV토론은 오는 26일 뉴욕주 헴스테드, 10월 9일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 19일 네바다 주 라스베이거스에서 각각 열린다. 클린턴의 개인 이메일을 폭로한 위키리크스의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가 “몇 주내에 힐러리 클린턴 관련 자료를 공개하겠다”고 나선 것도 무시할 수없는 변수다.
클린턴과 트럼프는 모두 역대 대선후보들 중 가장 '비호감' 인물들이다. 트럼프는 포퓰리즘·인종주의·반페미니즘 등 비호감 요소를 두루 갖추었고, 클린턴 역시 정직성과 진실성에서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클린턴의 비호감도는 트럼프와 똑같이 57%, 뉴욕타임스 조사에서는 64%에 이르렀다.
워싱턴의 기성 정치권에 대한 반감이 최대 화두인 상황에서 퍼스트레이디․ 상원의원․ 국무장관을 지낸 '최고의 기성정치인' 클린턴이 최고의 타깃이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월가 대형 금융기관들로부터 받은 고액강연료 수입 등으로 재산을 불려 '상위 1%'란 딱지까지 붙었다. 국무장관 시절 뉴욕 집에 개인 서버를 구축해놓고 공무를 봤던 일, 석연찮은 해명과 최근 건강 이상 논란에 이르기까지 '힐러리는 정직하지 못하다' 는 많은 유권자들의 인식이 그녀에게 최대의 적(敵)이 되고 있는 셈이다.
현재까지 객관적 정황은 클린턴 우세가 분명하지만 승패를 뒤집을 '복병' 또한 도처에 도사려있다. 최대승부처인 미시건 오하이오 위스콘신 펜실베이니아 등 러스트벨트(쇠락한 공장지대) 4개주의 표심향방이 우선 주목꺼리다. 자유무역협정과 세계화로 이들 지역 산업체와 일자리가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며 트럼프가 득표에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지역이다.
민주당 후보경선과정에서 클린턴의 득표율은 56%, 버니 샌더스는 44%였다. 샌더스는 경선결과에 승복해 클린턴 지지를 선언했지만 샌더스에 열광했던 지지자들 상당수는 클린턴 지지를 꺼려하고 있다. 클린턴에 실망한 샌더스 지지자들이 기권하거나 트럼프 지지로 돌아설 가능성도 결코 배제 못한다.
트럼프의 대선 캠페인이 영국의 브렉시트(유럽연합탈퇴)캠페인과 너무도 닮았다는 점이 클린턴진영을 오싹케 만든다. 대선의 키워드는 워싱턴정치와 월가의 '큰손' 등 기득권집단에 대한 '분노'다. 소득양극화와 자유무역 및 이민에 대한 불만에다 엘리트집단과 주류언론이 브렉시트 반대에 앞장서듯 트럼프에 일제히 반기를 들고 나선 것도 닮았다.
클린턴의 당선은 곧 '오바마3기'를 의미하며, '부시 부자(父子)'에 이어 '클린턴 부부'대통령 등 미국이 무슨 왕조냐는 거부감도 한 몫 한다. 영국의 중산대중들처럼 미국 백인 유권자들의 '반란'에 의한 '브렉시트 데자뷰'는 클린턴 진영에겐 악몽이다.
클린턴과 트럼프 둘 다 싫다는 여론이 35%에 이른다. 트럼프는 예측불허라 미국을 어디로 끌고 갈지 몰라 두렵고, 힐러리는 도통 마음을 알 수 없어 무섭다고 한다. 높은 비호감도에 찍어줄 후보가 없어 선택이 제한된 미국 유권자들이 딱하다. 이도저도 아니면 '판이라도 엎고 보자'는 극단적 충동도 생겨날 수 있다. 우리의 내년 대선 역시 이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