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어느덧 나이 쉰을 바라보는 가장이지만 일 년 전만 하더라도 사업의 실패와 채무는 우리 가정을 깜깜한 암흑 속에 빠뜨려 모두가 힘겹고 고달픈 하루하루를 보내던 시기였습니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식들의 교육과 결혼자금에 대한 준비, 정년 퇴직에 대한 대안으로 사업을 시작하였지만 지금까지 직장 생활만 해온 저에게 사회는 하나의 생존 정글이었습니다.
동업자에게 배신의 아픔을 당하고 전업주부로 살고 있던 아이들의 엄마 생각에 제대로 된 사업을 해보겠다고 밤낮으로 미친 듯이 사업에 매달렸지만 매달 돌아오는 건 빚 독촉과 카드 영수증 뿐…….
초등학교때부터 십여 년 이상 다니던 자식들의 학원을 중단하는 것을 시작으로 휴대전화 정지와 그나마 아이들의 엄마 이름으로 가지고 있던 집도 팔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내몰렸을 때는 죽음까지도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의 얼굴에서 진한 어두움을 보았을 때 가장으로서 책임감에 잠을 못 이루고 눈물을 흘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되지도 않는 사업에 몸과 마음이 지쳐갈 즈음, 가정일로 급전이 필요하여 후배에게 돈을 부탁했을 때 후배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주던 목소리가 아직도 제 귀에 들리는 듯 합니다.
"형, 미안한데 얼마 안 되는 돈 줄 수도 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아서 한 마디만 할게……. 형, 제발 이제 정신차리고 안 되면 공사판에라도 나가, 형 지금 건강하잖아, 공사판 나가면 빌려달란 돈 3일이면 벌어, 다른 사람에게 손 내밀지 말고 떳떳하게 벌어서 불쌍한 형수 갖다 줘, 그러면서 다시 기회를 만들어 봐"
처음에는 그 후배 욕을 많이 했습니다. 매몰찬 후배의 한 마디가 제 가슴을 후벼 팠고 후배에 대한 서운함과 부끄러움으로 인해 진한 자괴감으로 한동안 괴로웠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후배에게서 짧은 문자가 왔습니다.
"형, 미안해, 그렇지만 새벽에 일어나서 직업소개소에 나가 봐, 그리고 한번 두 시간 정도만 있어봐, 그래도 필요하면 형 필요한 돈 해줄게……"
그 문자를 받고도 후배에 대한 서운함이 가시지 않았지만 당장 돈이 필요했기에 한번 다녀와서 부탁할 요량으로 집 근처의 직업소개소를 찾아 신정네거리역 근처 직업소개소를 6시 정도에 나갔습니다.
평소보다 이른 새벽 5시에 일어나 직업소개소를 나가는 도중 거리의 사람들이 그 이른 시간부터 일터로 향하는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항상 7시 넘어 출근하던 저에게는 새로운 모습이었죠…….
그리고 6시 조금 못되어 직업소개소에 들어가 쭈뼛거리며 서 있다 보니 신청서에 이름과 인적사항을 적으라며 종이 한 장을 주더군요.
그때까지는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도, 무조건 일을 하려고 간 것도 아니기에 종이를 받기만 하고 적지 않고 앉아 있는데 소장이란 분이 현장 가야 된다며 빨리 작성해서 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일단 작성해서 제출하고 제 이름을 부르기에 오늘은 갑자기 일이 있어 내일부터 할 거라는 변명을 하려는 순간, 그 이전부터 앉아계시던 아저씨 한 분이 저를 보면서 소장에게 소리를 치시더군요.
"다섯시부터 나와서 기다리는데, 왜 나는 안부르는 거요?"
그 소리에 소장이란 분이 현장에서 쉰살 이하로 보내달라고 해서 아저씨는 안된다고 말씀하시는 소리에, 소리를 치시던 아저씨가 욕설 비슷하게 하면서 다시 자리에 앉으시더군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벌써 3일째 사무실 출근 도장만 찍고 있는 거라며 제발 오늘은 부탁한다 하시면서……. 언뜻 보니 나이는 50중반 정도 되시는 것 같은데 아저씨 눈에서 얼핏 눈물이 흐르는 것처럼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하셨습니다.
"나이 한두 살 젊은 사람보다 더 열심히 할 수 있는데……."
살면서 그처럼 조용한 목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리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나이드신 아저씨들은 불안한 모습으로 자기 이름이 불리기만 초조한 모습으로 기다리지만 저처럼 조금 젊은 축에 속하는 사람들은 곧잘 호명되서 몇 명씩 함께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생후 제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그토록 강하게 들었던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후배의 말처럼 건강한 육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 돈 몇 만 원도 없으면서 그 돈을 우습게 여기고, 수억 원의 돈을 한번에 벌 욕심에만 눈먼 내 자신. 부모님, 여동생에게 손을 내밀어 살아가는 아귀같은 흡혈충…….
단 하루 동안의 새벽 인력시장에서 제 인생에 있어 소중한 깨달음은 그렇게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날은 집에 와서 아내에게 내일부터 일을 간다고 말하고 옷 좀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직업소개소 소장에게 출퇴근이 아닌 숙식을 하면서 일할 수 있는 곳을 부탁했더니 화성 삼성전자 공사현장을 소개시켜주더군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숙식을 하면서 삼성전자 반도체 현장 공사장 보조인부로 일당 85,000원. 그리고 제 새로운 값진 인생은 시작되었습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오후 5시 퇴근, 연장이 있으면 8시 퇴근에 일당 120,000원. 그렇게 한 달이 되어 제 손에 들어온 돈이 삼백만 원 남짓, 이 돈을 토요일 저녁 집에와서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아내가 고생했다며 끌어안고 흘리는 눈물을 1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아내에게도, 부모님에게도, 모두에게 저는 그동안 죄인이었습니다. 또한 땀을 흘리며 일하는 내 모습이 소중하고 보람된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현장에서 땀을 흘리며 일하는 도중 근로장려금, 자녀장려금 신청 안내를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그것도 집에서 떨어진 지방에서 장려금을 신청할 시간도 없거니와 여력도 없어 포기할까 하다가 전화로도 신청이 가능하다는 소리에 퇴근 후 숙소에서 한 번 신청을 해보았습니다. 신청에서 접수까지 한 번에 되더군요.
신청만 되고 나중에 서류가 부족하다거나 자격이 안된다는 등의 이유로 혜택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그 후, 하루하루 현장에서 땀을 일하던 와중에 추석이 다가왔습니다. 현장도 추석 연휴 쉰다고 했지만 그때까지도 금전적인 여유가 없었기에 부모님을 뵈러 갈 생각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일전에 신청했던 장려금은 당연히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추석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지방의 부모님과 통화에서 일 때문에 못내려간다며 죄송하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습니다. 한푼이 아쉬운 마당에 추석에 쉬겠다고 내려갈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차비를 보내 줄테니 아이들 데리고 내려오라 말씀하셨지만 차마 그렇게까지 할 염치가 없었습니다.
집사람과도 이번 추석은 그냥 집에서 가족끼리 보내고 다음 설에 내려가자며 이야기를 끝내고 추석을 앞두고 마지막 한 주의 일을 더하기 위해 지방에 내려가려고 교통카드 충전을 위해 현금인출기에서 현금을 인출하다보니 제 계좌에 백만 원 조금 넘는 돈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송금 오류로 다른 사람이 잘못 보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송금자를 보니 '국세청 장려금'으로 표시가 되어 있더군요. 그제서야 몇달전에 장려금 신청했던 것이 생각나더군요
너무 기뻤습니다. 꼭 복권에 당첨된 기분이었습니다. 집사람에게 이야기하니 무척 좋아하더군요. 그러면서 이번 추석에는 부모님께 내려가자는 말을 먼저 꺼내더군요. 고마웠습니다.
평생 저를 위해 살아오신 부모님이지만 짐만 되어버린 못난 자식일지언정 명절에 남들처럼 찾아뵙지도 못한다는 사실이 가슴을 누르고 있었기에 말입니다.
그리고 그날 점심 때 더 놀라운 사실은 자녀장려금 명목으로 백여만 원 정도 추가로 지급된다고 안내를 받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고등학교 입학하는 작은 아이의 교복과 입학금 등이 부담됐는데 자녀장려금으로 사용하면 되니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못 내려간다는 소리에 실망하시던 부모님께 장려금이 나와 덕분에 형편이 되어 내려간다고 말씀드리니 잘됐다며 좋아하시던 부모님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장려금 덕분에 작년 추석에 부모님과 여동생들 모두와 함께 따뜻한 추석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올 초 통장에 남겨놓은 자녀장려금으로 아이들 교복을 새로 해주며 부모 도리를 조금은 한 듯하여 가슴이 뿌듯합니다.
지금은 현장일을 그만두고 회사에 취직하여 출퇴근하는 평범한 직장 생활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가장 어려울 때 부모와 자식의 도리를 할 수 있게 해준 근로·자녀장려금 관련 담당자들에게 이 글을 빌어 감사하다고 인사를 올리며 혹시 몰라서 신청을 안 하신 분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알려 혜택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수기작성자 : 서울특별시 박ㅇㅇ(양천세무서 출품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