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미 두 번째 시집 펴내
◆…사진=파란
생명을 갖지 않은 평범한 물건에 영혼이 깃든다. 녹아든 영혼에 관통된 구멍이 시어를 만나 이야기로 피어오른다. 그립기도 쓸쓸하기도 때론 혼란스럽기도. 다만 여느 때보다 매섭게 몰아친 한파에 잔뜩 움츠러든 요즈음 가만히 곱씹게 만든다.
2009년 '시에'로 등단한 김선미 시인이 2017년 첫 시집 '마가린 공장으로 가요, 우리'에 이어 두 번째 시집 '인왕'을 펴냈다. 4부에 걸쳐 51편의 시가 영혼을 어루만진다.
어제 산 블라우스를 입고 블라우스를 산 그 집 앞을 지나기는 매우 난처한 일이야/ 내가 홀딱 벗겨지는 것 같아 내 영혼이 걸려 있는 것 같아/ 블라우스를 보며 처음 먹은 마음과 커지는 마음과 잡아먹히는 마음/ 무슨 마음인지 알겠어?/ 쉽게 얻는 건 버리기도 쉽지 아니 이 말이 아니지/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어렵지 않아 이런 말도 아닌데 살인자처럼 굴 일은 아니잖아/(중략) 똑같은 옷이 옆집에도 그 옆집에도 또 그 그 그 옆집에도 앞집의 엽집에도 걸려 있을 텐데/ 영혼이 다다다다다닫 걸려 있을 텐데/ 오늘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 성직자의 뼛조각을 천만 원에 판매한다는 기사가 떳다더니('어제 산 블라우스' 부분)
블라우스에 투영된 영혼. 그저 흔한 물건 중 하나에 그칠 수 있으나 영혼으로 승화시켜 마음을 비춰본다. 그렇게 세상도 빗대어 본다.
구멍을 담는다 모든 신들이 거처하는 곳 또는 누군가의 무덤이기도 한 그곳에서 눈에 휴대폰에 가슴에/ 사람들은 천정에 구멍을 내고 하늘을 닮고 싶어 했지/ 그게 사랑하는 길이라 믿었네 별들이 반짝이는 걸 믿었네 봄여름가을겨울 믿었네/ 떠나왔던 곳으로 떠나갈 곳으로/ 구멍을 나르는 사람들/ 걷거나 뛰면서/ 높은 곳으로 어두운 곳으로도/ 깊은 잠 속으로/ 문장 속 행간으로도/ 믿음이 무덤으로 변해 가고 있다는 걸 버려진 무 밭에 와서야 알았다 한 뼘씩 웃자라 구멍 숭숭 바람 든('Dom' 부분)
사광으로 빛이 들어오는 곳에서 먼지가 흐르는 모습을 보며 포즈를 취해 본다 요즘/ dum(b) dum(b) 댄스가 유행이라던데 손가락이 얼굴을 기어 올라가는/ 이쁘더라 bom(b) bom(b)/ 폭탄이 떨어지는 걸 영화 속 장면으로나 봤을 눈이 푸른 아이 휘파람 휘휘 불며 눈을 찡긋/ 넘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지/ 파헤쳐진 장면을 보면 왜 천국이 떠오르는지/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괄호 속의 소리들('묵음, 묶음' 부분)
시인은 사회 곳곳에 혹은 우리네 삶 속에 녹아들어 있는 구멍을 찾았다. 한 편에선 즐거움이나 행복이, 다른 한 편에선 고난과 역경이 펼쳐진 아이러니한 세상을 바라보게도, 반성하게도.
인왕은 연옥 어디쯤인 것 같다/ 나는 그 밑자락에 살고 있어/ 비 오는 날은 어디선가 굿하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해/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도가 필요한/ 떠돌다 올라타게 되는 버스 같은 것/ 영혼 같은 것/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다/ 어깨가 무거운 사람들아/ 네 위에 올라탄 영혼의/ 버스 요금을 대신 내주렴/ 불 켜진 전광판으로 몰려드는/ 살아 있는 것들 어쩌면 살아 있지 않은/ 환하게 웃고 있는 배우의 맨살에 앉은/ 하루살이들/ 눌러 죽이는 내 손가락을 내가 쳐다본다/ 도망가자/ 어디로든 가자 해 놓고/ 나는 십 년째 피 묻은/ 선풍기로/ 바위산에 꽂힌 깃발로/ 빨갛게('인왕 1' 부분)
구멍만 있으면 사람들은 왜 돌을 던져 놓거나 쌓는지 모르겠어 고목에도 태양에도 해골바위에도/ 기도발을 세우기에는 어둡고 거칠고 공허한데/ 희한한 건 그런 돌들이 어디에나 있다는 거지/ 쌓기 좋고 던지기 좋고 걷어차이고 굴러떨어지기 좋은/ 가벼운 마음으로 물고기나 새가 되어도 무방한/ 색깔과 모양으로('인왕 5-나의 시' 부분)
신수진 문학평론가는 시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구멍이 "삶의 가장 끝자리까지 밀려나 천대받으면서도 그 모순과 붕괴의 구덩이 속에서 기거하는 사제의 자리"라고 풀었다. "시가 특정한 의미로 해석되지 않을 때 증폭성 자체로 의의를 갖게 되듯이 사제 역시 없음 즉 구멍으로 계시되는 찰나를 전할 때마다 거기 있게 되는 것"이라 이야기했다.
박형준 시인도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구멍을 보면서, 그 구멍이나 부스러기들 틈에서 솟아나는 영적 기운에 이끌려 열광적이고 다채로운 언어로 귀신 혹은 신탁의 말을 전한다"고 했다.
시인은 사제가 돼 흩어진 영혼을 거둬주려는 듯 대신 노래했다. 풍파에 밀려 아스라히 잊혀진 영혼을 보듬는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도록. 시인이 들춰낸 세상의 이면을 마주해 부끄럽게도 한다.
인왕 / 김선미 지음 / 1만 2000원 / 파란 펴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