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强) 대 강'의 치킨게임으로 치닫던 한반도 위기가 마침내 대화국면으로 흐름이 바뀌고 있다.
출구전략을 찾는 미국과 중국의 대화 움직임에 한국의 박근혜대통령이 미리 보조를 맞추는 형식으로 북한과의 대화를 사실상 제의하고, 미국이 이를 공식화하면서 대화국면이 조성되고 있다.
북한은 우리 측 대화제의를 '교묘한 술책'이라며 일단 거부했고, 청와대도 '참으로 유감'이라며 여전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북한이 미국의 대화제의에는 아무런 비방을 않고 있고, 우리 측에 대해서도 대화의지가 있다면 "말장난이 아니라 근본적인 대결 자세부터 버려야한다", 앞으로 대화여부는 "전적으로 남조선 당국 태도 여하에 달려 있다"고 말해 대화 성사의 여지를 남겼다.
북한이 우리정부의 대화 제의를 일단 거부한 것은 아직 대화로 전환하기에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다는 판단과 함께 공을 상대방에게 넘겨 좀 더 나은 협상여건을 만들기 위한 복합적 포석으로 풀이된다.
우리 측에 대화제의의 구체적 내용과 태도변화를 요구하며 기(氣)싸움을 시작한 것으로 읽혀진다.
미국은 비록 북한의 기존 합의 준수를 대화의 전제 조건으로 내걸긴 했지만 6자회담이든 양자회담이든 형식에 상관없이 실질적 대화를 하고 싶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내비쳤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시험을 연기하는 등 '무력시위'를 자제하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만난 자리에서 "어느 누구도 한반도의 갈등을 원하지 않는다"며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북한의 선(先) 변화를 요구한 기존 입장과는 달리 전격적으로 북한과의 대화를 제의하게 된 것은 이런 미국의 대화움직임에 자극 받은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는 북한과 타협하기 위한 대화가 아니라 "북한이 왜 그러는지 이야기를 나눠 보자는 취지의 대화 제의"라는 점을 강조했지만 앞으로 전개될 대화국면을 우리가 주도해야겠다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결정으로 보인다.
북한 문제에 관한 한 우리가 중심 고리 역할을 해야 하고, 대화국면에서 주도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면 미 중 두 강대국의 종속변수 신세를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박근혜대통령이 방한한 존 케리 미 국무장관에게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와 관련된 정책구상을 길게 설명했고, 케리 국무장관이 한국의 정책결정을 존중하겠다고 다짐한 것은 한국의 역할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의미 있는 정지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한미가 대화를 언급하고 있지만 국제의무 준수 등을 전제조건으로 달고 있고, 어떤 대화를 어떻게 하자는 내용도 빠져 있어 강경한 태도를 이어온 북한이 급격히 방향을 전환하기에는 명분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한편에선 따른다.
특히 장거리 로켓 발사와 핵실험 성공으로 주도권을 쥔 북한의 군부가 이 정도 제안으로 강경한 태도를 접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적지 않다. 이달 말 한미 독수리연습이 끝나면 남북 및 북미가 냉각기를 가진 뒤 본격적인 대화 탐색전에 나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주변국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한반도 상황관리를 주도적으로 하려면 당사자인 남북한 간에 대화가 필수적이다. 신뢰프로세스의 첫 단계도 대화복원이다.
대통령이 어렵게 대화 제의의 물꼬를 텄지만 실제 대화를 통한 신뢰확보는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청와대의 한 고위 관계자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안에는 '북한과의 약속은 지킨다', '전쟁 중에도 대화는 한다', '핵문제가 해결되면 다양한 지원 계획을 진행한다'는 3원칙이 포함돼 있다"며 "그 연장선상에서 대화를 제의한 것일 뿐 입장이 바뀐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반면 북측은 "남측이 공업지구를 두고 돈줄이라고 모독하고 억류요, 인질이요 떠들며 인질 구출 작전까지 거론하면서 도발한 것이 개성공단 위기의 원인"이라며 진정 대화의지가 있다면 말장난이 아니라 근본적인 대결 자세부터 버려야 한다고 촉구했다.
박대통령이 "위협을 통해 남남갈등을 유발하려한다"고 북한을 거듭 비판하고, 북측이 " 대화를 원한다면 모든 적대행위에 대해 사죄하라"고 우리 측에 요구하는 등 성명공방이 이어지고 있어 대화의 모멘텀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대화국면을 앞두고 대북메시지를 둘러싼 정부 내 거듭된 혼선도 문제다. 대통령의 대화제의를 놓고 통일부와 국무총리 청와대 간에 '대화제의가 맞다', '아니다'로 혼선을 빚었고, 북측 반응에 대한 우리 측 입장정리에서도 통일부와 청와대 간에 '대화거부는 아니다', '대화거부다'로 혼선을 빚었다.
대화모드로 돌아선 대통령의 결단이 '대통령 원맨쇼' 같은 인상을 풍기고, 대통령 자신도 혼자서 대화제의를 했다가 북측반응에 직접 비판에 나서는 등 우왕좌왕하는 모습이다.
북한의 미사일발사 여부가 현재로서는 큰 변수이지만 중거리 미사일 발사에 대한 제재 조치는 수위가 낮다는 점에서 제재국면이 본격화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중요한 것은 대화 쪽으로 국면 전환의 계기가 마련된 현 상황을 우리가 어떻게 활용하느냐다. 북한의 위협 탓에 미·중 간 정책공조가 이루어지고 중국이 한반도안보위기에 적극 개입할 가능성도 커졌다. 하지만 북한 핵을 보는 시선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한국과 일본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은 북한이 핵개발에 나서게 하는 요인으로 중국은 보고 있다. 북한을 나무라면서도 한미군사합동훈련에 B-52와 B-2폭격기가 참여한 것을 가리켜 "불에 기름을 끼얹어선 안 된다"고 미국에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박대통령의 신뢰프로세스에 큰 그림이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이를 꺼내 보일 때다. 내달 초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있고, 중국 시진핑과 박대통령과의 '오랜 친구' 관계는 한․중외교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넓혀주고 있다.
북한에 대한 대화제의가 도발-대화-보상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기회를 날려버린다는 주장도 설득력은 있다. 하지만 한국의 새 정부가 구상하는 남북관계의 밑그림과 대화의 진정성을 북측에 전달해 당장의 극한대립과 오판을 막는 것이 더 중요하다.
대화 없이 신뢰가 쌓일 수가 없고, 신뢰프로세스가 작동돼 남북간 대화가 활성화되어야 우리 주도로 한반도상황을 관리해 나갈 수가 있다.
누가 먼저 제의를 하고, 누가 누구에게 끌려 다닌다는 식의 자존심싸움은 큰 의미가 없다. 대결과 제제만으로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남북한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신뢰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진정한 신뢰의 리더십을 발휘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