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미국방문 일정 막바지에 터진 '윤창중 성추행 의혹 사태'가 방미(訪美)성과를 집어삼키며 박근혜 정부 국정운영에 또 하나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
청와대 홍보수석과 대통령비서실장이 사과를 하고, 사과에 '인색' 하던 박근혜대통령도 취임 후 77일 만에 공식회의석상에서 본인의 육성을 통해 국민께 송구함을 표하고 청와대를 비롯한 공직자 기강확립을 다짐했다.
청와대와 여권은 '윤창중사태'와 방미성과는 별개라며 사건을 서둘러 진화하고 방미성과 불씨 살리기에 안간힘이다. 하지만 국민들의 상심이 워낙 큰데다, 사태수습과정에서 청와대의 시스템적 무능까지 드러나면서 청와대의 신뢰추락과 함께 박대통령의 '불통인사' 또한 다시 도마에 오르고 있다.
사태의 궁극적 책임은 잘못된 인사를 강행한 박 대통령 본인에게 있는데도 이 부분에 대한 사과와 시정조치에 관한 언급이 없고, 당당하게 국민 앞에 나와 사과하지 않고 수석비서관회의라는 자리를 빌려 송구함을 표한 사과형식에도 문제는 없지 않아 보인다.
방미성과와 '윤창중사태'에 대한 사과는 별개라지만 둘 모두 국격과 연결돼 있다. 성공적인 방미는 국격을 끌어올린다. 윤창중의 개인적 잘못이 국격을 크게 훼손시켰지만 국가차원에서 잘못된 점을 두루 살피고, 열린 마음으로 바로 잡는 성숙함이 국가이미지 관리에서는 중요하다. 창피하다고 윤창중사태를 서둘러 덮고 방미성과만을 자가발전한다고 국격이 올라가지는 않는다.
국격을 중시하는 외교부의 장관이 "외교적 파장을 걱정 않아도 된다"고 장담을 하고, 성추행의혹사건에 이념적 잣대를 들이대 '종북좌파의 덫에 걸렸다"는 식의 우리 사회 일각의 음모론이 우리의 국격을 우리 스스로 떨어뜨릴 뿐이다.
박대통령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처음으로 만나 개인적 신뢰를 쌓고 대북정책 등 주요 사안에 대한 상호이해를 통해 앞으로 4년간 긴밀히 협조할 기반을 만든 것은 매우 중요한 성과다. 특히 박 대통령이 주창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와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서울 프로세스)'을 설명하고 오바마의 이해와 협조를 얻은 것은 큰 소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북한과 동북아 문제 해결에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미국이 양해 내지 수용한 것 일뿐 이들 전략적 구상을 실행 가능한 정책으로 로드맵을 만들고 외교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일은 전적으로 제안자인 박대통령의 본인의 몫이다. 박대통령은 성과보다는 더 많은 숙제를 안고 귀국한 것이다.
그 출발점은 북한이다. 하지만 대북정책에 관해 한미정상은 어떠한 국면전환이나 돌파구를 열지 못했다. 두 정상이 합의한 대북정책은 한마디로 '대화의 문'은 열어 놓되, 북한에 대해 강력한 억지력을 갖추고 도발에는 단호히 대처한다는 것이다.
북한과 대화와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북한이 협력하지 않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기존의 대북정책을 지속해 나가겠다는 뜻을 천명한 것이다.
북한이 비핵화의 전제조건으로 요구한 '체제보장'에 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북한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이명박대통령의 '비핵·개방·3000'을 포장만 바꿔 다시 내 건 대결정책이라고 한·미 정상회담을 맹비난하고 있다.
한·미 정상회담 이후에도 한반도위기가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된다. 당면한 한반도 위기해소에 관한 한 박대통령의 방미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박대통령의 신뢰프로세스가 모호하고 불완전하다는 지적이 미국 일각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오바마는 박 대통령의 제안이 미국의 지금까지의 대북정책을 변경시킬 만한 어떤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고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 공식적인 지지를 표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미 양국이 대북 억지 준비가 되어 있고, 침략에 대처하며, 도발행위를 보상하지 않으며, 북한이 다른 길을 택하는 모습을 보일 때를 대비해 포용정책의 문을 열어 놓는다는 데 이미 인식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북한의 비핵화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미국이 핵우산을 제공하고 첨단 재래식 무기로 한국을 무장시켜 대북 억지력을 강화시킨다는 것이 오마바정부의 입장이다.
박 대통령은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북한이 도발을 통해 보상을 얻고 더 큰 보상을 위해 더 큰 도발을 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겠다고 선언해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는 여태 알려진 것이 없다.
최근 들어 박대통령이 국내외에서 행한 북한에 대한 일련의 언급은 강경모드일색이다. 북한은 고립될 수밖에 없다거나,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 병진노선'의 성공불가능, '나쁜 행위'에 대한 국제사회의 일관된 메시지전달 필요성, '누가 북한에 투자하겠느냐' 등등 하나같이 북한을 자극하는 내용들이다. 북한이 변하지 않는 한 어떤 대화도 않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대화 없이 신뢰프로세스는 가동이 불가능하다. 무고한 인질을 구출하기위해 납치범들과도 협상을 마다하지 않는 마당에 남북 간 대화가 단절된 상태에서 한국이 어떻게 한반도문제 해결에 주도권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박근혜 신뢰프로세스의 딜레머다.
신뢰프로세스에 북한의 참여가능성을 열어두면서도 비핵화요구조건이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은 점을 들어 '핵무기를 지닌 북한과 평화공존하기 위한 틀이 아니냐', '베이징을 논의의 장으로 끌어들이고, 북한과 어울리는 것을 가려주는 위장막이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미국 전문가도 있다.
박대통령의 다음 여정은 바로 중국이다. 한·미 정상간 합의는 성공적 대북정책을 위한 매우 중요한 한 요소다. 하지만 중국의 이해와 협조 없이 박대통령의 구상은 성공하가 어렵다. 한·미 정상회담의 합의사항을 '한·중관계판'으로 연결․확장시키는 벅찬 과제가 걸려있다.
한·미동맹 강화에 방점이 찍힌 박대통령의 방미 성과를 너무 떠벌리는 것은 중국방문을 앞둔 박대통령에게는 부담일 수가 있다. 북핵문제에 제제보다는 대화를 선호하는 중국의 기본입장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제재와 압박이라는 두 요소를 함께 지닌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에 대한 중국의 지지를 이끌어내려면 한-미-중을 함께 아우르는 큰 그림이 필요하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rebalancing) 전략이 시너지를 내며 한·미관계와 한·중 관계의 동반 발전을 주도할 때 한국의 위상과 국격은 절로 올라간다.
대북문제를 놓고 여와 야, 노와 소, 진보와 보수가 생각과 접근법을 달리하는 우리 내부에서부터 초당적 협력과 합의를 도출해 내는 일이 중요하다. 인사시스템 재정립 등 '윤창중 파문'에 대한 제도적 수습책과 함께 박대통령이 씨름해야 할 안팎의 숙제는 너무도 무겁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