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질금리 마이너스 시대, 노후 '사각지대' 있다

안전하다고 예금통장 넣어두는 건 창고 보관과 다름 없어

"퇴직연금이 시행된 지 8년이 지났지만, 아직 도입하지 않은 기업이 꽤 있습니다. 특히 소기업이나 영세 사업장의 근로자들은 급여나 복지 수준에서 노후 준비의 안정성이 떨어지는데도, 퇴직연금 가입에 취약합니다. 정책 당국 입장에서 볼 때 '사각지대'라고 할 수 있지요."

퇴직연금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가입 기업은 꾸준히 늘고 있지만, 재정이 부족한 중소기업들은 여전히 제도를 충분하게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손성동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연구실장(상무)은 "퇴직연금 시장이 순조롭게 성장하고 제도적으로 평등이 보장돼 있어도 현실적인 측면에서 모든 기업의 가입 여력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는 지난 2004년 설립, 은퇴나 투자 관련 교육에 힘쓰면서 이 분야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하고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손 실장은 10년 넘게 퇴직연금 분야를 연구했으며, 기업연금 회계에 관한 연구, 기업연금 세제에 관한 연구, 기업연금제도의 운용과 위험관리 방향, 기업연금제도의 수급권 보호, 장수 사회의 미드필더 퇴직연금 등 저서와 논문을 저술했다.

조세일보(www.joseilbo.com)는 향후 퇴직연금이 바람직하게 발전하고 국민들의 노후 준비 수단으로 정착되기 위해 어떠한 방법을 찾아야할지 모색하고자 미래에셋은퇴연구소를 찾았다.

■ 중기 재정 능력 낮아, IRP 제도 활성화 필요 = 퇴직연금은 기존의 퇴직금을 대신해 은퇴 후 분할지급 받는 제도로, 지난 2005년 국내에 도입됐다. 500인 이상의 대기업 가입률은 100%에 가깝지만 30인 미만 소기업의 경우 10%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손성동 실장은 "정책적으로 볼 때 중소기업의 가입이 상당히 중요한데, 재정 능력이 떨어지는 사업장 입장에서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고 우려한다.

다양한 퇴직연금 가입 경로를 마련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인형 퇴직연금(IRP)도 미흡한 점이 적지 않다. 

정부는 질병이 있거나 무주택자 등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 IRP 중도 인출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이직 시에 퇴직금을 IRP에 의무적으로 이전시키도록 했으나, 개인의 재산권 선택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전하자마자 일시금으로 인출할 수 있어 실효성이 떨어진다.

손 실장은 "제도가 제대로 정착되려면 근로자가 스스로 충분히 이해하고 동의해주는 게 중요하지 강제로 퇴직연금을 이용하도록 하는 것은 취지에 맞지 않다"면서도 "가입과 동시에 인출을 하는 사례가 있는 등 실제 사용이 안 돼 소용이 없는 지경"이라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59.5세 이전에 특별한 사유 없이 IRP 적립금을 인출하면 10%의 세금을 페널티로 부과한다.

■ 실질금리 마이너스, '안전 신화' 무너진다 = 퇴직연금은 시작과 동시에 '블루오션(blue ocean)에서 레드오션(red ocean)으로' 바뀐 시장이다. 가입 기업을 유치하면 한꺼번에 많은 근로자의 퇴직금을 적립할 수 있으면서 길게는 30년까지 장기 운용을 할 수 있어 금융회사 간 경쟁이 치열하다.

문제는 경기 침체로 저금리 시대가 오면서 퇴직연금 이자가 물가 인상률에 못 미치는 실질금리 마이너스(-)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후 준비 자산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근로자들은 원금이 보장되는 상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조세일보가 220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156명(70.9%)은 금리가 낮아도 원금이 보장되는 것을 선호했으며 나머지는 원금 손실의 위험이 있더라도 공격적으로 운용해 수익률을 높이기를 원했다.

손 실장은 "이른바 '안전 신화'라고 보여지는데 퇴직연금에서 '안전의 의미'를 원금 보장으로 보는 것은 위험하다"고 했다.

예를 들어 은퇴 후 월 100만원을 받아야 생계가 가능하다고 가정할 때 100만원을 만드는 것이 안전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기업 재무 담당자들의 안전 선호 현상도 문제점으로 지목된다.

현행 퇴직연금 제도는 크게 확정급여(DB)형과 확정기여(DC)형으로 나뉘는데, 이 중 DB형은 은퇴 직전 3개월의 평균 급여를 원금으로 산정하며, 기업의 재무 담당자가 운용한 수익률에 따라 이자를 지급받는다.

근로자가 해마다 일정한 금액을 자율적으로 납입하면서 직접 운용하는 DC형과 비교할 때 안정적이지만, 수익률이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손 실장은 "재무 담당자들이 운용을 잘한다고 해서 보너스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만일 손실이 나면 그 책임을 져야 한다. 따라서 다양한 상품에 투자하기보다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투자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이는 선진국과 반대되는 현상인데 선진국 DB형의 경우 위험 자산 비중이 더 높다"면서 "기업이 개인보다 리스크 분석력이 뛰어나지만 리스크 테이킹(위험을 각오함)을 하지 않고 예금통장에 넣어두는 건 운용이 아니라 창고에 보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덧붙였다.

■ 영세 사업장들, '연합형 DC' 활성화 절실 = 퇴직연금이 사회 구석구석까지 침투하는 것은 시간이 적지 않게 걸릴 일이다.

앞서 퇴직연금을 도입한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이러한 문제점은 있었다.

정부가 다양한 제도를 내놓아도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자영업 종사자들의 퇴직연금 이용을 위해 정부는 '연합형 DC'를 만들어, 여러 개의 사업장이 한꺼번에 가입해 비용을 절감하도록 했으나 아직 신청한 곳이 없다.

손 실장은 "요식업, 숙박업 등 자영업 협회나 각 지역의 산업 단지들이 가입할 것을 생각해 만들었는데 전혀 활용이 안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관련 법 개정에 따라 자영업 종사자들은 오는 2017년부터 IRP에도 가입할 수 있다.

한편 호주나 홍콩, 스위스 등 일부 국가들은 기업들이 퇴직연금을 의무적으로 가입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한국도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이 개정되면서 올해 이후 신설된 사업장은 의무 가입을 해야 하지만 기존의 기업들은 예외이다.

손 실장은 "퇴직연금 의무화를 하더라도 기업이나 근로자가 최대한 공감할 수 있는 선을 찾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탈도 많고 잡음도 많을 수 있다"고 제언했다.

아울러 "정규직 사원뿐 아니라 비정규직, 시간제 근로자들이 퇴직연금에 가입할 수 없는 것 역시 우리나라 제도의 미비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