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기관 '국세청'
1966년 개청(開廳)이래 국세청은 '권력기관'의 범주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조세부과권과 세무조사권이라는 막강한 권한이 국세청에 덧씌운 색채다. 하지만 지난 역사 속에서 국세청 스스로 이 권한을 남용, 스스로를 옭아맸다.
국세청이 정치적인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사례는 상당하다. 밝혀진 사례도 여럿이지만 밝혀지지 않은 사례의 존재가능성이 커다란 의심을 낳고 또 그 의심이 국세청 조직에 대한 강력한 규제의(관리·감독) 필요성을 만들어 냈다.
국세청 조직원이 개입된 크고 작은 비리 사건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수장(首將)'들이 연이어 불미스런 사건에 연루되어 망신을 당하는 치욕의 역사를 안고 있는 기관이 국세청이다. 물론 조직 자체가 문제의 근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시 말해 국세청 입장에서도 억울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철저히 시스템화된 2만 조직원을 거느린 조직이 굴러가는데 빈틈이 없을 수는 없다. 더구나 '금권(金權)'을 매개로 움직이는 특성을 감안하면 조직을 구성한 '사람', 즉 크든 작든 권력을 가진 자들의 욕망까지 시스템화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국세청이 휘두르는 조세부과권과 세무조사권에 대한 의구심은 지워지지 않고 있다. 이 같은 환경적 조건이 '국세청법'을 태동시켰다. 국세청의 권한 사용에 대한 의구심을 원천적으로 없애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 논의가 시작된 것이 바로 국세청법 이다.
세풍(稅風), 그리고 1999년
1997년 국세청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이 터졌다. 국세청이 동원된 불법 정치자금 모금사건, '세풍(稅風)' 사건이다. 이 사건은 어마어마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국세청 고위직들이 특정 대통령 후보자를 위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다는 사실은 국세청의 존립자체를 위협할만한 대형사고였다. 주모자 중 한 명이었던 이석희 전 국세청 차장은 세무상 혜택을 미끼로 23개 기업으로부터 160억원이 넘는 자금을 불법으로 융통해 냈다.
세풍 사건은 국세청의 정치적 중립 문제를 수면 위로 급부상시킨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결과적으로 어수선한 분위기가 정리되어가던 시점이었던 1999년 이른바 '국세공무원법'의 태동으로 이어졌다. 안정남 당시 국세청장은 국세청의 정치적 중립과 세무공무원의 책임소재 강화를 위해 국세공무원법 제정을 추진했다.
제2의 개청을 선언하는 등 강도 높은 국세청 체질개선 작업을 추진했던 안 전 국세청장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국세공무원법은 국세공무원을 특정직으로 전환하고 국세행정고시(5급)를 신설하며 국세행정수당(세수증대포상금)을 지급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아울러 국세청의 만성적인 인사적체 해소를 위해 계급정년제(5급 15년, 4급 13년, 3급 5년, 2급 4년)를 도입하고 금품 등 비리행위 적발시 처벌을 대폭 강화하는 내용도 포함했다.
시도는 과감했지만 결말은 좋지 못했다. 국세공무원의 특정직 전환에 대한 행정자치부(현 안전행정부),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등 관계 기관의 반대가 국세공무원법 도입 의지를 꺾어버렸다. 그리고 시간은 국세공무원법을 망각의 영역으로 밀어냈다.
2007년, '국세청장 임기제'
2006년 7월12일 전군표 국세청장 내정자 인사청문회(이하 전 전 국세청장). 당시 전 전 국세청장은 "국세청의 정치 중립성을 보장하고 국세공무원의 전문성과 청렴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조직·직무범위·인사 등을 포괄 규율하는 국세청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냈다.
비록 행동으로 옮겨지지는 않았지만, 당시 국세청 조직 전반에는 국세청법 도입이 필요하다는 정서가 짙게 깔려 있었다. 이듬해인 2007년, 인사청문회 당시 전 전 국세청장에게 국세청법 제정 의견을 물은 국회의원 주도로 '국세청법' 제정이 추진됐다.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엄호성 전 의원이 국세청법 도입안을 국회에 대표발의 했다. 엄 의원이 대표발의 한 국세청법은 1999년 국세공무원법과 유사성이 많았지만, 확연한 차이점 몇 가지 존재하고 있었다. '국세청장 임기제'였다.
엄 의원의 국세청법 도입안은 국세청장 임기제(2년 단임제) 도입을 통해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며 기관을 운영할 수 있도록 했다. 아울러 '국세청장 내부승진제'를 법률에 못박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분위기 상 국세청법 도입은 현실성이 매우 높았다. 그해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이명박 전 대통령이 국세청장 임기제를 아예 대선 공약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잡힐 만한 거리까지 접근했던 국세청법은 또 다시 사장됐다.
대선 분위기에 당시 정기국회에서 제대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듬해 4월 18대 국회가 개원하면서 계류 중이던 국세청법은 폐기됐다. 17대 국회에서 국세청법을 대표발의하며 강한 의지를 보였던 엄호성 전 의원도 낙선, 국세청법 도입 추진은 '용두사미'가 됐다.
국세청법, 다시 떠오르다
2007년 이후 전군표 전 국세청장, 이주성 전 국세청장이 금품비리에 연루돼 감옥에 갔다. 한상률 전 국세청장은 부적절한 인사로비에 휩쓸려 불명예 퇴진했다. 허병익 전 국세청 차장도 금품비리에 연루, 수감됐고 전군표 전 국세청장도 불똥을 맞아 재차 수감됐다.
국세청이 과장 조금 보태 매년 쇄신방안을 내놓고 있지만 국세공무원들이 연루된 비리사건은 끊이지 않고 있다. 국세청 자체적인 노력에 대한 '불신(不信)'이 커졌고, 또 다른 힘에 의한 국세청 개혁 필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이는 '시대정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세행정의 투명성 확보, 국세청의 비(非)권력기관화를 위한 시도는 사실상 지금부터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국회에 제출된 국세청법은 과거와는 조금은 다른 시각의 접근법을 택할 필요성이 있다.
민주당 정성호 의원이 대표발의 한 국세청법은 국세청장 임기제 도입(2년 단임제)이 핵심이지만 외부의 힘을 빌려 인사 및 조직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기획재정부 산하 '국가세무위원회' 설치)하는 것이 진짜 목적이다.
국세청장 내부승진제는 우회적으로 명문화했다(1급 공직자 중 후보자 추천).
이외에도 1999년, 2007년 입법안과는 다른 조직운용의 세련미를 더하는 제도신설 내용들이 녹아들어 있다. 시간은 지났지만 2013년 판 국세청법의 도입취지는 변하지 않았다. 국세청의 정치적 중립 확보다.
지난 8월 국회에 제출된 국세청법 입법안은 내달 정기국회 논의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로서는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다. 발의자들이 속한 축(민주당)의 도입의지는 강하지만, 여전히 국세청법 도입을 껄끄러워 하는 이들의 반박논리 또한 높고 견고하다.
기획취재 : 김진영 정책팀장, 이희정·이현재·강상엽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