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경 첫 시집 '벽에 걸린 여자' <사진: 두엄>
김옥경 첫 시집 '벽에 걸린 여자'
가객 김옥경이 작지만 귀중한 시의 성채 '벽에 걸린 여자'(두엄·사진)를 세상에 공개했다. 58편의 시를 모아 자신의 이름이 적힌 문패를 단 첫 공간이다. 성채 안에는 지금까지 그가 왕래한 굴곡진 길과 영혼을 위로하던 요새 같은 숙소, 외풍에 부대끼고 쿨럭이던 깃발이 온전히 보관돼 있다.
슬픔에 허기진 것처럼 남보다 더 많이 울고 아파하던 언어의 성감대가 곳곳에서 신열을 앓고 있는 마을. 때로는 우상 파괴적 제스처도 눈에 띄고 절대 권위를 해체하는 소리도 들린다. 인간과 자연의 동선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기를 훈련해온 그가 이제 성채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세월이 얼룩진 벽
그 벽에 몸을 걸어놓은 채
붙박이가 된 여자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본다
시치미를 떼고 있는
뻔뻔스러움이 번들거리는
그녀의 허리를 어루만지려는 순간
수천의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여자
가끔 사람들은 묻는다, 그녀가 누구인지
(중략)
입 벌어진 눈곱의 절반이 떨어진다
눈을 뜨고 누운 나, 옷을 입고 있는나
아무에게나 얼굴을 보여주는 나
가끔 사람들은 묻는다, 당신은 누구지
- '벽에 걸린 여자' 부분
시인은 표제작 '벽에 걸린 여자'에서 정체성을 알 수 없는 액자 속 여성과 자신을 동일화한 후 제3자를 통해 자신이 누구냐고 묻는다. '수천의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여자'가 누구인지, '아무에게나 얼굴을 보여주는 나'가 누구인지…. 그러면서도 시인은 존재가 본질에 우선한다는 듯 짐짓 초연하고 무심하다.
하긴 삶과 예술에 무슨 정답이 있으랴. 시인의 페르소나인 '홀로 앉아있는 그녀는/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여자'(목이 긴 여자)이며 '눈물이 모여 떨어진/ 별 하나에 지워지지 않는/ 때 묻은 여인의 얼굴'(섬집 여자)일 뿐이다. 우리는 그 모습대로 그저 그렇게 살아갈 뿐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상처와 흉터, 약점에 대한 정확한 뉘앙스를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써 한 편의 시를 잡아챈다. 마치 영화 배우가 인상적인 연기를 펼치듯 '장면을 훔치는 데' 능하며 그 단편들이 모여 '작품 전체를 훔치는' 결과에 도달한다.
자타칭 '길치'로 통하는 그가 잘못 내린 기차역에서 '몰락한 한 생이 무너지듯/ 기울어진 담벼락 옆/ 게으름에 감염된 고양이/ 마른 생선대가리를 앞에 놓고/ 외로움을 빨고/ 나는 때 묻은 손톱을 빨고/ 하루 분량의 기억이 멈춘 이곳에서/ 너는 내가 누군지 모르지/ 나도 너를 모른다/ 그래, 그냥,/ 길고양이와 길치로'('청리역')라고 묘사한 대목은 대단히 매혹적이다.
도회적 애잔함과 향토적 그리움을 동시에 표출하는 시인. 이미지와 소리에 특히 예민한 예인. 현상과 사물에 대한 정통한 해석으로 현실을 꿰뚫던 야전사령관이 마침내 '이해하기보다는 분노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그러면서도/ 나는 분노를 부인하고/ 얼마나 깊이 빠졌는지/ 이미 예고된 울음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바다'('세월이 빠진 바다')라는 큰 인식에 도달했다.
서문에서 시인은 자신을 지금까지 옭아매던 실로 한 필의 옷감을 짜내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날아가고 싶다고 털어놨다. "시는 로망도 아니고 벼랑이거나 구원과 같은 거"라는 박창기 시인은 김옥경에 대해 "날카로운 듯하면서도 익살이 묻어나는, 투박하면서도 그리움이 묻어나는 사유의 길을 존중한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