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는 한동안 ‘서서히 뜨거워지는 물속의 개구리’에 비유되곤 했다. 개구리는 끓는 물이 담긴 냄비에 넣으면 재빨리 냄비 밖으로 뛰쳐나간다. 하지만 찬물에 넣고 온도를 조금씩 올리면 개구리는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결국 뜨거운 물에 익혀 죽는다.
위기요인으로 경제가 주저앉고 있는데도 멀쩡한 겉모양만 보고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한국인들의 위기불감증을 꼬집는 말이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매킨지는 얼마 전 ‘저성장 시대의 해법’을 주제로 개최한 포럼에서 한국경제를 ‘느리게 가는 자전거’로 묘사했다. 느리게 가는 자전거는 좌우로 뒤뚱거리며 균형을 잡기가 힘들다. 경기침체가 지속되면서 저성장기조가 굳어지고, 저성장-저소비-저투자-저고용의 악순환이 한국경제라는 ‘자전거’를 언제 넘어뜨릴지도 모른다는 위기위식이 깔려있다.
이런 바깥의 위기진단과 국내의 ‘경제실패론’에 우리 당국은 펄쩍 뛴다. 박근혜대통령은 2주전 청와대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이제 지나친 비관과 비판의 늪에서 빠져나와 경제 체질을 바꾸고 혁신을 이뤄 제2의 도약을 이뤄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통령은 그 장담의 근거로 스탠더드앤푸어스(S&P)의 국가신용등급 상향조정,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4위의 경제성장률, 지난 5년 중 최고치를 기록한 국민소득 증가율, 낮은 국가채무비율을 들었다.
글로벌 금융위기이후 현재까지 미국의 신용등급을 올리지 않고 있는 S&P가 최근 우리의 신용등급을 상향조정하면서 동시에 일본의 신용등급은 한 단계 떨어뜨렸다. 우리의 견실한 재정상황과 대외건전성을 높게 평가한 탓이다. 우리로선 반갑고 고마운 일이지만 지나친 의미부여는 금물이다.
1995년 S&P는 우리나라 신용등급을 A+(긍정적)에서 AA-로 올렸다가 2년만인 1997년 8월에 A+로 한 단계 다시 내렸고, 그리고 12월까지 넉 달 동안 무려 10단계나 아래인 B+(투기등급)로 떨어뜨려 외국자본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게 만든 한 맺힌 전력이 있다.
우리의 성장률이 OECD 4위라는 자찬은 좀 낯간지럽다. 덩치가 크고 경제가 성숙될수록 성장률은 낮기 마련인데 그런 선진국들보다 성장률이 높다고 자위하는 것은 억지다.
소득증가율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높아진 것은 유가하락으로 대외거래가 유리해 진 탓이 크고, 국가채무비율은 선진국들에 비해 낮지만 악화되는 속도가 문제다.
한국경제의 성장률 전망치는 날로 낮아지고 있다. 한국은행은 올해 성장률이 애초 전망치인 2.8%에 못 미칠 것으로 우려했다. 한국경제연구원도 전망치를 2.7%에서 2.4%로 낮추었다. 성장률이 1% 오를 때마다 7만개의 일자리가 만들어진다고 추정할 때 매년 쏟아지는 40만~50만 명의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주려면 턱없이 부족하다.
박 대통령은 성장률을 높이기 위해 경제민주화를 포기하고 각종 부양책과 규제완화를 동원했지만 경제가 나아지기는커녕 양극화만 심화됐다.
대내외 여건을 보아 앞으로 3% 이상의 성장은 기대하기 어렵다. 반도체 전자 자동차 조선 철강 등 한국을 먹여 살렸던 수출주력산업은 급격하게 국제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
내수활성화를 대안으로 강조하고 있지만 인구가 5천만 명에 불과한 한국이 내수주도 성장으로 적정한 일자리 창출과 국민이 원하는 삶의 질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자영업과 소상공업 서비스업은 여태 거대한 저생산부문으로 처져있고, 의료를 포함한 바이오 사물인터넷(IoT) 로봇 우주항공 등 신성장산업이 한국의 주력산업으로 성장하는 데는 최소한 10년이 걸릴 전망이다.
‘느림보 자전거’가 균형을 잘 잡고 지속적으로 속도를 내려면 경제시스템을 지속가능한 ‘포용성장’(Inclusive Growth)으로 재정비해야한다. ‘포용성장'은 성장의 열매를 고루 나누고 빈부 격차를 최소화하면서 국민 전체의 실질적 생활수준 향상을 통해 경제성장의 동력을 지속적으로 확보해나가는 성장방식이다.
유럽 등 선진국들이 1~2%대 낮은 성장률에도 경제사회가 안정적인 것은 사회복지를 통한 원활한 재분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세제와 복지 등 소득불평등 해소 관련 정책은 산업선진국 중에서 최악의 수준이며 분배구조악화가 마침내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
얼마 전 세계경제포럼(WEF)보고서는 한국의 소득 재분배가 취약한 가장 큰 원인으로 소수 대기업을 비롯한 기득권층이 경제적 이득을 독차지하는 구조적 부패를 지목했다.
시장경제원리가 활성화되지 못한 곳에서 공급제한, 인위적인 시장진입 장벽 등 과도한 행정규제와 정치적 영향력행사 등으로 독점적 이윤, 소위 경제적 지대(地代)가 발생한다. 이를 얻기 위해 치열한 로비활동이 전개되고, 이 과정에서 뇌물과 부패가 만연한다.
WEF는 특히 한국에선 “사회 여러 부문에서 힘이 센 사람들, 특히 가족경영을 하는 소수 대기업에 이 이득이 집중되고, 이는 각종 규제시스템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자리가 많이 생기려면 개인의 의욕과 창의가 살아나 새로운 기업이 많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기득권계층이 사업기회를 독과점하고 갖은 ‘갑질’로 새로운 기업의 성장을 막아 경제의 역동성을 갉아먹는 구조라는 얘기다.
부의 사회적 이전이 안 되고 부자세습으로 빈부격차가 세습되면서 ‘헬조선’(지옥 대한민국), ‘망한민국’의 자조가 이 땅의 젊은이들을 절망으로 내모는 상황이다.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시키는 단기성장률 위주의 통화정책, 구호와 무늬만의 4대개혁, 대기업을 동원한 전시적 창조경제,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의 ‘관치세일’ 같은 근시안적 접근으로는 문제가 풀릴 리 없다.
분배구조 개선과 경제력 집중 해소가 사회통합과 국가발전의 원동력임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국민소득 3만, 4만 달러라는 수치목표가 능사가 아니고, 열심히 일하면 개인 능력만으로도 성공하고 미래를 설계해 나갈 수 있는 맑고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 진정한 개혁이고, 지속적인 성장을 담보하는 길이다.
중장기적으로 경제정책도 국내중심 사고에서 시야를 넓혀 내수기반을 동북아 역내경제로 확충하고, 북한과 유라시아를 아우르는 ‘북방경제’를 한반도 번영의 새로운 돌파구로 삼는 발상의 대전환도 시급하다.
1100조원의 가계부채와 함께 이자조차 갚지 못하는 좀비기업들이 시한폭탄처럼 우리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청와대와 여당이 공천권을 놓고 편을 갈라 권력게임에 몰입할 때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