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길진 칼럼] 한려수도가 비단처럼 펼쳐져
경남 남해군 상주면(尙州面)과 삼동면(三東面)에 걸쳐 온몸을 비단으로 휘감은 듯 아름답게 솟아 있는 산이 있다. 금산(錦山). 이름 그대로'비단 산', 즉 '실크 마운틴'이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절경과 비경 가운데 산으로서는 유일하다.
사람으로 치면 완벽한 미인이다. 어느 한구석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균형과 조화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오죽하면 '금산 38경'이다. 8경도, 10경도 아닌 무려 38경이다. 감상하고 음미할 미(美)를 38군데나 지닌 산계(山界)의 미스코리아 격이다.
금산은 개명(改名)이다. 본명은 보광산(普光山)이다. 보문(普門)에서 '보(普)'자를 따왔다. 보문은 관세음(觀世音)의 별칭이다. 아니나 다를까 고승의 작명이다. 신라 신문왕(神文王) 3년(683년) 이 산에 풀집을 짓고 수도하던 원효대사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감동으로 지은 이름이다. 지고지선한 존재는 또렷한 형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드물다. 희뿌연 기(氣) 기둥 혹은 빛과 오버랩 되는 게 대부분이다. 원효도 관세음보살을 역광으로 봤고, 이는 보광산의 '광(光)'자로 기록됐다.
보광산을 금산으로 갈아치운 인물은 조선 태조 이성계다. 고려를 내리고 조선을 올리는 준비과정에서 이성계는 명산을 돌며 자신의 뇌파를 한껏 모아 기도했다. 보광산도 기도 장소 중 하나였다. 결국 새 나라를 여는 데 성공한 이성계는 보광산 기도의 '약발'을 잊을 수 없었다.
심드렁하기만 했던 백두산과 지리산의 산신과는 딴판으로 보광산신은 태조의 청을 기꺼이 수용했기 때문이다. 원효대사의 기도처에서 200m 남짓 떨어진 삼불암(三佛巖)에서 치성을 드리면서 보광산신에게 약속한 것을 지키고 싶었다. 기도 중 난데없는 닭 울음소리에 뒤를 돌아본 순간 눈이 마주친 천계암(天鷄巖)의 기억도 생생했다.
주로 계룡산과 북한산을 오가고 있는 태조 영가(靈駕)는 마침 금산, 정확히는 금산의 조선 태조기단(祈壇)에 머물고 있었다. 태조가 무슨 깊은 뜻이 있어 금산에 들렀으려니 했지만 지레짐작이었다. “일은 무슨 일…. 하도 추워서 잠시 내려와 있을 뿐”이라는 답이었다. 영혼도 추위를 탄다. 남해군의 1월 평균기온이 1.7도, 2월에는 3.3도로 따뜻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겨울철이면 각 종목 운동선수의 전지훈련장으로 인기 높은 지역이 바로 남해다.
태조가 털어놓았다. “100일 기도를 올리면서 그랬지. '세상을 내게 주면 산을 온통 비단으로 덮어주겠다'고. 그런데 비단이 어디 좀 귀한가. 이 큰 산을 무슨 수로 다 감싸겠는가. 그래서 꾀를 냈지. 산 이름을 아예 금(錦)으로 바꿔버렸다네.”
태조 옆을 그림자처럼 지키는 정도전의 영가가 끼어들었다. 금산이라는 작명은 자신의 아이디어였다는 것이다. “비단이야 닳고 퇴색하겠지만 산 이름을 새로 내리면 영원할 것이라고 했더니 대왕(태조)이 반색을 하더라”는 고백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인의 수사(修辭)는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라는 점을 재확인한 순간이다.
결과적으로 개명은 타당했다. 금산은 비단 부럽지 않다. 산 자체의 이미지를 '비단으로 치장한 미녀'라 해도 딱히 토를 달 사람은 없다. 금산의 별명이 소금강산(小金剛山), 남해금강(南海金剛)이니 달리 할 말이 있을 수 없다. 게다가 금산은 바다와 섬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보통 바다와 섬이 아니다.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으로밖에는 형언할 길이 없는 한려수도가 코앞에 미니어처처럼 펼쳐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