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회계사들 그 좋았던 시절은 가고…
-취업못한 수습회계사들만 3백여명…4대고시란 말은 옛말
서울 강남에 사는 C씨(44세).
대학을 졸업한 뒤 대기업체에 입사했던 그는 공인회계사로의 화려한 변신을 꿈꾸며 10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는 시험준비 2년만에 미국으로 건너가 AICPA(미국공인회계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또한 올해에는 KICPA(한국공인회계사)에 도전, 평균 80점 이상의 고득점으로 합격의 영예를 안았다.
최고 점수(평균 83.4점)에 가까운 성적을 거둔 그는 화려한 미래를 꿈꾸며 수습을 받기 위해 여기저기 회계법인들을 수소문, 입사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기다리던 '합격'의 통지는 없었다.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불합격의 이유는 수습회계사들의 과잉배출에다 나이가 많기 때문이었다.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그는 끝내 혈관파열증세로 병원에 입원하고 말았다.
'자본주의 파수꾼', '연봉 2억원대', '직업선호도 1위'….
그동안 '士字 직업'으로, 변호사, 의사 등과 함께 선망의 대상이 됐던 공인회계사들이 수습을 받는 수습기관마저 찾지 못하게 되면서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공인회계사라는 '士字 직업'의 메리트가 '선망의 대상'에서 '없는 것보다는 낫다' 것으로 여지없이 무너지고만 것이다.
수습회계사들의 이같은 취업난은 관계당국이 올들어 공인회계사 선발인원을 대폭 확대하면서부터 미리 예고돼 왔다.
'부실감사를 막고 회계서비스의 질적 향상을 위해서'라는 것이 관계당국의 선발인원 확대 이유였다.
정부측은 매년 공인회계사들을 200∼300여명선에서 선발해 왔다. 그러다가 지난 98년부터는 500여명을 늘려 뽑았으며, 올해에는 급기야 예년 선발인원의 두배나 되는 1천14명을 뽑았다.
올 공인회계사시험 합격자 가운데 연수대상자는 모두 734명. 이 가운데 취업을 한 합격생은 470여명에 불과했다. 3백여명에 가까운 합격생들이 수습기관을 찾지 못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된 것이다.
이들 미취업 합격자들은 앞으로 실무수습기관을 정해 취업하지 못할 경우 합격증은 있지만 자격증이 없어 회계사로서 활동이 불가능하다.
사법고시 2차시험에 합격해 놓고도 사법연수원에 들어가지 못해 변호사 자격증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 꼴이다.
이번 공인회계사 미취업 사태는 정부가 선발인원을 늘렸지만 실무수습기관에서 이들을 모두 채용하지 못하는 공급과잉 현상이 벌어진 데 따른 것이다.
수습회계사들의 실무수습기관은 회계법인과 정부기관, 금융기관, 외부감사대상기업체 등 9천여개가 넘는다.
수습회계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회계법인은 올해 450여명을 선발하는데 그쳤다. 이에 따라 삼일회계법인을 비롯한 안건 안진 등 '빅5' 회계법인의 지원율은 평균 80대1(복수지원 포함)을 넘어섰다.
불과 2∼3년전만 해도 '수습회계사 모셔오기 경쟁'을 벌였던 이들 회계법인들은 회계사 선발인원이 큰 폭으로 확대되자, 학벌, 나이, 전공 등을 선별해 뽑는 '칼자루를 쥔 자'가 된 것이다.
80점 이상의 고득점을 얻고도 나이나 학벌 등에 밀려 입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는 합격생들의 흥분 배경이 여기에 있다.
이번 합격자들의 학교분포를 보면 서울대와 연대, 고대 등 명문대의 경우 미취업자는 합격생의 10% 미만인 반면, 중위권 이하의 경우 50% 이상이 취업하지 못했다.
심지어 서울 모대학의 경우에는 합격자 30여명 중에서 단지 3명만이 겨우 취업을 했을 뿐이다.
3년동안 시험준비 끝에 합격했다는 K씨는 "회계법인에서 성적순이 아닌 학벌과 나이 등으로 선발 기준을 정하면서 고득점자 상당수가 입사하지 못했다"며 울상을 지었다.
회계법인에 입사하지 못한 수습회계사들은 금융권과 기업체 등으로 눈을 놀려보지만 이 또한 쉽지가 않다. 경기불황으로 취업문이 좁아진데다 수습회계사를 원하는 부서는 경리·재무팀 등으로 극소수 인원만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특히 기업체에서는 수습회계사를 아예 선호하지도 않는다.
합병후 처음으로 신입사원을 모집한 한빛은행의 경우 200명 모집에 1만1천600여명이 지원을 했고 이 가운데 60여명의 수습회계사들이 응시했다.
이 은행의 관계자는 "회계사를 필요로 하는 부서가 심사업무에 한정돼 있어 극소수 인원만 뽑게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3년전 10여명의 수습회계사를 선발했던 J금융의 관계자도 "3년동안 실무수습을 마치고 수습회계사 모두가 회사를 떠났다"며 "앞으로는 수습회계사를 뽑지 않기로 회사 방침을 정했다"고 털어놓았다.
관계당국은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채 선발인원을 늘려 취업 대란을 초래했지만, 뾰족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의 관계자는 "수습회계사들이 여러 분야로 진출할 때 업무영역이 확대되고 자율경쟁을 통해 회계서비스의 질적인 향상을 높일 수 있다"며"회계사도 전문자격사 중에 하나일 뿐, 스스로 실무수습기관을 찾아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반면, 수습회계사들은 "실무수습을 받지 못해 자격증이 없는데 어떻게 자율경쟁을 할 수 있느냐"며 발끈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측은 내년에도 올해와 같은 수준인 1천여명의 공인회계사들을 선발한다는 방침을 세워두고 있어 논란이 계속될 전망이다.
이와관련, 회계사업계는 "300명이 넘는 수습회계사가 당장 취업을 하지 못하는데 또다시 1천명을 뽑을 경우 취업 대란을 몰고 올 뿐"이라며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또 "분식회계를 막고 회계서비스의 질적 향상을 위해 선발인원을 확대한 정부 정책의 기본 취지는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지만, 무조건 선발인원만 늘릴 경우 감사덤핑 등으로 오히려 부실감사를 심화시키게될 것"이라며 우려하고 있다.
이처럼 4대 고시에 해당되는 회계사 시험에 당당히 합격하고도 실무수습기관을 구하지 못한 인재들이 올 한해동안 300여명이 발생했으며 이같은 현상은 매년 되풀이 될 것으로 보여 회계사 인기가 크게 떨어질 전망이다.
kwk@joseilbo.com
취업못한 수습회계사들
"그동안 투자한 시간이 너무 아깝다"
4년동안 시험준비 끝에 합격한 L씨(29·여). 그가 얻은 점수는 73.4점. 올해 평균 점수가 62.2점인 것을 감안하면 1천명중 300등 안에 들어가는 높은 점수다.
서울 시내 상위권 대학을 졸업한 그는 낙농공학과을 전공했지만, 경영학과를 부전공해 회계법인에 입사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삼일회계법인과 영화회계법인 등 4개의 대형 회계법인에 지원서를 냈지만 연락이 온 곳은 영화회계법인 단 한군데 밖에 없었다.
면접을 보았지만 경영학을 전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낙방을 하고 말았다. 금융권으로 눈을 돌렸지만, 이번에는 경쟁이 치열하고 나이에 제한에 걸렸다.
L씨는 "정부에서는 실무수습기관이 많아 수습교육을 받는데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지만, 뽑는 곳이 없는데 어떻게 입사를 할 수 있느냐"며 울먹였다.
지방대를 졸업한 P씨(33)도 L씨와 같은 처지. 지방대 출신이어서 대기업체에 입사하기가 곤란하자 대학을 다니면서 회계사 시험 준비 8년만에 합격의 영예를 안았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잇따른 낙방 소식을 접하게 됐다. 지방대 출신이라는 이유로 회계법인은 물론 일반기업체 조차도 선발을 기피하는 바람에 면접 한번 보지 못한 것이다. 지인을 통해 로컬회계법인(지방회계법인)에 입사원서를 냈지만 아직까지 연락이 오지 않고 있다.
P씨는 "회계사 시험에 합격해 실력만 갖추면 지방대학의 한계를 넘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투자한 시간이 너무 아깝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