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과 권력 사이…내 편 없는 김병준의 '딜레마'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실세 국정농단의 핵심 최순실.

"정국 빠르게 변해... 주변 의견 듣겠다"…총리직 고사 가능성 열어둬

그는 총리직을 수락한 것인가, 아니면 고사할 수도 있다는 여운을 남긴 것일까.

2일 기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김병준 신임 국무총리 후보자가 뱉은 말들은 참으로 아리송한 뉘앙스를 풍겼다. 솔직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몇 시간 차를 두고 미궁에 빠진 자신의 상황처럼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파문으로 인한 국정공백 사태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2일 전격적으로 김 후보자를 지명했지만 야당이 들불처럼 들고 일어나 반대 선언을 하면서 인준의 기본 절차인 인사청문회조차 열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김 후보자는 이날 종로구 삼청동 금융감독원 연수원에서 기자들과 만나 "소감이라든가 현안에 관한 문제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내일 제가 따로 시간을 한 번 더 만들겠다"고 밝혔다.

통상 총리후보자는 지명을 받은 직후, 기자회견이나 소감문을 통해 인사청문회에 임하는 자세와 향후 국정운영 방향 등 각오를 밝히는 것이 관례아닌 관례인데 야당이 청문회 자체를 거부하면서 총리 지명에 대한 소감조차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 김병준 "정국 빠르게 변해... 내일 입장 발표" = 김 후보자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책임총리 권한 행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게 있느냐'는 질문에 "당연히 있겠죠"라며 "자세한 것은 내일 말 하겠다"고 거듭 즉답을 피했다.

◆…김병준 신임 국무총리 후보자

그는 자신의 총리 지명을 기화로 더욱 악화일로에 접어든 민심과 야당의 보이콧을 의식한 듯 "2시에 말씀을 드리고자 했는데 역시 정국이 빠르게 변하니 많은 분들의 의견을 종합해서 결례되지만 연기했다"고 설명했다.

또 스스로 거국내각을 주장했다가 총리직을 수락한 배경에 대해서는 "사실 오늘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내일 전부 종합해 말하겠다"고 입장발표를 '내일(3일)'로 미뤘다.

들끓는 여론과 야당의 청문회 보이콧으로 인한 김 후보자의 난감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야당의 청문회 거부는 그가 총리직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형국을 만들고 있다. 김 후보자로서는 총리직을 수락하기도, 수락을 거부하기도 힘든 '딜레마'에 빠진 셈이다.

□ 朴대통령 이제 '사정권'…'하야' 목소리 거세져 = 비선실세 최순실의 국정농단은 이제 사실상 박 대통령을 '사정권'으로 몰아넣고 있는 모습이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설립 과정에서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모금 지시를 한 당사자로 지목된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이 "난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미르-K스포츠 재단 일을 했다"고 언론 등에 폭로하는 등 박 대통령이 이 모든 일의 '몸통'이었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나아가 대한민국 헌법학자 20명 중 19명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로 규정하며 박 대통령이 수사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을 냈다.

한 언론사가 헌법학회 소속 헌법학자 20명을 대상으로 헌법 84조에 따른 대통령의 수사가능 여부를 물은 결과 전체 응답자 20명 가운데 19명은 "헌법 84조는 재직 중 '소추' 즉 '소송의 제기와 진행'만을 금지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대통령 역시 수사대상이 된다"고 밝혔다.

나아가 그동안 가급적 말조심하는 분위기였던 야권 대선주자들과 야권 내부에서 박 대통령의 독선적 인사 강행에 대해 성토하며 '대통령 하야'를 본격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 상황의 출발점이 '김병준 총리 후보 지명'이다.  

□ "인사청문회 안 열려 후보자 불명예" 김병준 이력에 '오점' = 이런 상황에서 김 후보자가 총리직을 수락할 경우(사실상 현재는 수락한 상태나 다름없다), 성난 민심과 야권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격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책임총리직인만큼 박 대통령을 대신해 모든 책임을 지는 가혹한 운명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야권 관계자는 조세일보(www.joseilbo.com)와의 통화에서 "열리지도 않을 인사청문회를 기다려야 하는 총리 후보자가 되는 것이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일인가"라며 "현 시국에서 침몰하는 배에서 내리기는 커녕 같이 침몰하겠다는 김 후보자가 이해가 안 간다"고 비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박근혜 대통령이 지금 할 일은 개각이 아니라 먼저 자신을 수사를 하라고 입장을 명확히 하는 것인데, 민심을 보지 않고 자신의 권력만 유지하겠다는 뜻을 내비치니 국민 분노는 더 치솟을 것"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김 후보자가 지명된 것은 김 후보자 스스로 명예에 오점을 남기는 것이라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특히 벌써부터 김 후보자가 표면적으로 최순실 게이트 불똥에 사퇴했지만, 부정부패 의혹으로 언젠가는 불명예 퇴진했을 우병우 전 민정수석과의 관계가 석연치 않다는 지적이 나와 논란이다.

□ 禹 장인과 친분 논란, 총리직 거부 시 박근혜 정부 '자멸'의 길 = 더민주 박영선 의원은 이날 자신의 트위터에 김 후보자가 지난 2013년 우 전 수석의 장인인 이상달 회장 추도식에 참석한 것을 지적하며 당시 지역신문 기사를 공유, 당시 추도사를 김 후보자가 했다고 밝혔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김 후보자는 2013년 6월30일 이 회장의 5주기 추도식에 참석해 "2003년 당시 서슬 퍼런 정권초기 민원조사 과정에서 부당하다며 비서관에게 호통 치던 회장님의 기개를 잊을 수 없다. 이는 청렴결백하고 투명한 경영의 자신감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했다.

박 의원은 "추모사 내용도 참여정부 당시 민원조사내용을 부당한 것으로 묘사했다"고 김 후보자를 저격하기도 했다. 또 "김병준 총리 지명자는 우병우 전 수석의 대리인인가"라고 겨냥했다.

김 후보자는 논란이 일자, 이날 "우병우 전 수석은 모르고 그의 장인 이상달 회장은 고향인 경북 고령 향우회 회장이라서 알고 있다"고 해명했다.

만약 김 후보자가 민심을 고려해 총리직을 거부할 경우, 박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은 그야말로 '제로' 상태가 되어 자멸을 초래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에 김 후보자가 얻은 하루라는 시간은 말그대로 고뇌에 찬 시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