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세씨는 아내의 권유로 그토록 싫어하는 '빨강색' 넥타이를 매고 집을 나섰다. 김조세씨는 '특별한 날' 엔 '빨강 넥타이를 매야 한다' 는 생각을 가진 아내가 조금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때 같으면 아내와 애교섞인 언쟁을 했을 법도 하지만 김조세씨는 그냥 아내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아무렴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니까.
아침부터 꽉 막힌 올림픽대로를 운전해 가면서 김조세씨는 몇 일 전 9시 뉴스에서 본 '쇼킹한' 뉴스가 문득 떠올랐다. 앵커의 멘트. "앞으로 물 좀 아껴 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정부에서 '물세'를 도입한다는 내용의 세법 개정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하는데요…" '물세' 가 도입된다고? 김조세씨는 순간 머리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 년 전부터 물 부족이 우려된다는 이야기가 공론화되기는 했었다. 물이 부족하긴 한 모양이다. 보도를 맡은 기자의 멘트.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니 정부가 빼든 최후의 카드는 역시 '세금' 이었습니다…"
김조세씨는 입맛을 '쩍' 하고 다시며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한창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로마시대에 군비조달 목적으로 '오줌세' 가 있었다는 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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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생리적 현상도 세금과세의 대상이 되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지난 2005년 발효된 교토의정서에 따르면 우공(牛公)들이 배출하는 방귀와 트림에 지구온난화의 주범이 되는 메탄가스가 다량 함유돼 있다고 합니다. 당시 뉴질랜드 정부가 소를 키우는 목축업자에게 '소방귀세'를 매기려다 한 차례 좌절됐다가 최근에 성공을 했거든요. 우리 정부도 이를 벤치마킹 한다는 차원에서 공론화 절차를 밟으려 하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온통 세금 만든다는 이야기 뿐이네' 김조세씨는 라디오를 껐다. 꼭 이런 날에도 세금 만든다는 뉴스를 들어야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오늘이 글쎄 납세자의 날인데... 한 쪽에서는 납세자의 날 행사한답시고 애꿏은 사람 '빨강 넥타이'를 매게 만들면서 한 쪽에서는 세금을 만들어 국민 부담을 늘리려 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모습이 '야누스' 에 뒤질 바 없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 길은 왜 이렇게 꽉 막힌 건지...김조세씨는 목을 조이고 있는 빨강 넥타이가 어색하다는 생각에 자꾸 백미러를 힐끔 거렸다.
행사가 시작되기 1시간 전 쯤 행사장에 도착했다. 국세청, 재정경제부 소속 공무원들이 행사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행사장 한 켠에 마련된 안내데스크에 자신이 오늘 행사의 꽃인 '2014 모범 납세자상'을 받게된 주인공이라고 말하자 안내직원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곧이어 말끔한 정장차림의 한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와 "이쪽으로 오시죠" 하며 김조세씨를 에스코트 했다.
'수상자 대기실' 이란 곳에 들어서자 모든 이목이 김조세씨에게 쏠렸다. 발걸음을 뗄때마다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남 앞에 서는게 익숙치 않은 김조세씨는 최고상을 받는 사람치고 너무 평범해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련된 의자에 앉자 자신이 국세청 무슨 국장이라고 소개한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이미 우리 직원들이 절차를 설명해 잘 알고 계시겠지요?", "아 네... 대충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저한테 이런 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올해 처음으로 일반 근로자 중에서 모범 납세자를 선정했습니다. 지금까지는 많이 낸 기업들 위주로 표창을 했는데... 시대가 많이 바뀌는 것 같습니다. 허허" 사람 참 좋다. "월급쟁이라서 곧이곧대로 세금낸 것 뿐인데요", "아닙니다. 근로자분들이야 말로 대접받아야할 납세자죠. 요즘에야 많이 줄었지만 기업들이나 자영업자들이 세금 좀 빼먹는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습니까", "아...네...", "5년전부터는 대통령도 납세자의 날 행사에 참석하셔서 직접 상패를 수여하고 계십니다", "그렇군요. 시대가 변하긴 했군요", "처음으로 민간출신 국세청장님도 부임하시고 납세자의 날 수상 기업들도 각종 시민단체에서 추천해 올린 기업들 중에서 선정됐습니다" 국세청 국장의 '시대변화상'을 듣고 있자니 갑자기 라디오에서 들은 '소방귀세' 와 뉴스에서 본 '물세' 생각이 떠올랐다.
"요즘 소방귀세, 물세 신설 이야기도 많던데...납세자 부담은 자꾸 늘어갈 모양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시대가 필요로 한다고 하지만...조만간 부가가치세 인하 논의가 본격화될 겁니다. 올해 국회에서 잘 처리될 것으로 봅니다" 그렇지. 부가가치세율을 5%로 인하한다는 소식이 있었지. 정부가 세금을 가지고 벌이는 외줄타기가 볼만하다는 생각이 뒤 따랐다.
"자 그럼 잠깐 쉬고 호흡조절 좀 하고 계세요. 행사 시작하면 안내하는데로 따라하시면 됩니다", "네, 말씀 잘 들었습니다" 국세청 국장은 문 밖으로 사라졌다.
시계를 보니 행사가 시작하기까지 30분 정도 남았다. 김조세씨는 잠깐 쉴 요량으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든다. 월차를 내고 나온 회사 일 걱정도 된다. 소방귀세, 물세, 부가가치세 인하, 새로 부과되는 세금, 내려가는 세금, 납세자의 날, 그리고 최초의 민간출신 국세청장, 최초의 근로자 출신 모범납세자 상 수상자...눈을 감으니 모두 꿈결처럼 느껴진다. 집을 나서기전 했던 아내의 말도 떠오른다. '여보, 오늘 잘 하고 오세요. 당신이 자랑스러워요…'
누군가 어깨를 건드리는 느낌에 김조세씨는 번쩍 눈을 떴다. "행사 시작됐습니다. 곧 나가셔야됩니다" 수상자들이 벌써 길게 늘어서서 입장대기 중이었다. 김 조세씨는 가장 앞에 섰다. 대통령 축사가 있는 모양이다. 방송에서만 들었던 대통령의 육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세금을 성실하게 내주신 납세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세금을 내고도 국민들이 존경을 받는 느낌이 없어서 섭섭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납세자에 대한 인식은 바뀌고 있고 또 계속 바뀌면서 진일보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정부는 세금 많이 낸 사람이 정당한 대접을 받는 문화를 만들도록 더욱 노력할 것입니다…"
대통령의 축사가 끝이 나면 이제 곧 수상자들이 올라갈 차례다. 김조세씨는 등골이 오싹해져 옴을 느꼈다. 그러나 이내 그 생각은 사라졌다. 오히려 '내 빨강 넥타이가 어색해 보이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에 김조세씨는 다시 한번 거울을 보고싶다는 생각만 간절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