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라고 하든지 정부라고 하든지 이들이 어떠한 업무를 하면 돈이 들어간다. 그 돈은 세금이나 정부의 부채로 충당된다. 궁극적으로 그 돈의 부담자는 납세자인 국민이다. 국가나 정부가 부실하게 살림을 살면 그 고통은 그대로 국민에 전가된다.
생존에서 복지로 국민의 삶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뀌게 됨에 따라 공공의 재정수요는 급격히 늘어났다. 새 정부의 증세방안도 국민의 복지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재정확충 방안이다. 대선공약이나 정책과제는 든든한 재정 없이 수행할 수 없으니 그 방안의 적정성을 떠나 증세의 길로 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박근혜 정부가 증세 없는 복지라는 허구적 수사로 혼이 난 것도 교훈이다. 국가의 책무에 대한 국민의 인식변화와 복지욕구는 정부에 더 큰 기대와 책임을 요구한다. 종래에는 자기 개인책임에 속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일도 이제 정부, 지방자치단체에 책임을 돌린다.
예컨대 천재지변과 각종 사고는 과거에는 어쩔 수 없는 불행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어떠한 꼬투리만 있어도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을 하고, 안 받아들여지면 법정으로 끌고 간다.
여기에서 국가나 정부가 국민 개인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는 의미를 새겨보자. 국가의 책임 영역이 넓어지면 국민은 마냥 좋아지는 것일까? 아직도 대다수의 국민은 물론 공직자조차도 세금은 공돈이라는 생각에 젖어있다. 툭하면 국가책임, 정부책임을 거리낌 없이 이야기한다.
요즈음 탈원전 공약을 둘러싼 공방에서도 그렇다. 주무 장관은 원전이 영구중단된다면 정부가 모든 법적 절차와 보상책임을 지겠다고 공언하였다. 신고리 5·6호기의 공사 일시 중단으로 발생하는 협력업체의 손실비용 1000억원은 산하 공기업인 한수원이 책임져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탈원전 논란으로 발생한 손실에 대한 정부책임이란 바로 수조원에 달한 그 손실을 세금으로 메우겠다는 것이다. 그에 따른 엄청난 세금을 따로 내야할 납세자는 안중에도 없는 발상이다. 치매의 국가책임, 건강보험 수혜확대, 고교 무상교육 등 다 이상적인 목표이기는 하다.
국민여론을 물으면 다들 좋다고 한다. 그렇지만 자신도 이러한 복지비용을 부담하겠다는 계층은 30%밖에 안 된다는 통계가 있다. 다들 “복지는 나에게 그 돈은 남의 주머니에서”라는 기대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조세의 역사는 왕권의 욕심과 무산 다중의 분배 욕구를 제어하고 조정하는 쪽으로 발전해 왔다. 세금을 내는 국민이 그 일에 과연 동의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 없이 걸핏하면 국가 책임, 정부 책임을 말하지 말라. 그야말로 무책임한 행태이자 도덕이 해이를 보여준다.
재판에서도 국가나 정부의 책임을 확대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어떤 판결에서는 사회복지 혹은 사회안전망에 맡겨야 할 사안에 대하여 국가나 정부에 광범한 책임을 지우는 경우가 보인다. 그러나 과거와는 다른 잣대를 적용하여 국가나 정부의 책임을 인정해 나간다면 이는 개인이 책임져야 할 일을 국민 전체의 책임으로 바꾼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 책임은 곧 세금을 의미하므로 책임으로 인한 배상액에 대하여 과연 납세자가 승복할 것인가에 대하여 한 번 짚어 보아야 마땅하다.
일본 교세라의 창업자인 이나모리 가즈오는 “소선(小善)은 대악(大惡)과 닮아 있고, 대선(大善)은 비정(非情)과 닮아 있다”고 말했다. 새겨들어 봄직하다. 공직자에게 국가나 정부의 책임이란 곧 세금 책임이라는 인식이 확고하지 않다면 제대로 된 선진사회가 되기 어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