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뻥 뚫린 관세행정 = 한진그룹 총수일가의 밀수 의혹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관세행정의 허점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아직 조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관세청이 해결해야 할 숙제는 점차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의 밀수 및 관세포탈 논란이 불거지면서 허점투성이 관세행정에 대대적인 '구조개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조사가 한창 진행 중인 한진그룹 총수일가의 밀수 의혹이 모두 사실로 밝혀지지 않더라도, 이번 사태를 통해 드러난 관세국경 관리 실태는 반드시 정비하고 갈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현재 관세청은 압수품과 카드사용 내역을 대조하는 한편, 한진 총수일가가 어떤 방식으로 밀수를 해 왔는지 중점적으로 살펴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총수일가 소환과 함께 현행 관세행정 체계를 개선하기 위해 관세행정 혁신 태스크포스(TF) 내 '특별대응팀' 출범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은 '인력' 문제?
'한진 총수일가의 밀수'라는 특이 케이스로 인해 이번 사건이 두드러져 보이지만, 관세행정 곳곳에 허점이 노출되어 있었다는 것은 웬만한 국민들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입국 시 세관에 신고를 하지 않고 가방, 시계 등 명품 등을 몰래 들여오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국민 대부분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재수가 없으면 걸린다'라는 말 속에 관세청 통관행정의 우울한 현실이 모두 녹아 있는 것이다.
적발될 경우 그에 따른 과태료와 가산세를 내야 할 위험이 있지만 '재수'가 좋으면 걸리지 않으니 마음 놓고(?) 해외에서 구매한 명품을 들고 들어오는 이들이 상당수라는 것이다.
실제로 여행자가 과세 대상 물품을 신고 없이 가져와도 세관에 적발될 가능성은 매우 낮은 편이다. 여행자의 화물은 엑스레이 검사를 100% 거치지만 실제 내용물을 열어보는 '개장검사'는 고작 1%대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엑스레이 검사는 테러물품 등 위험물품에 대한 검사를 위주로 하기 때문에 명품 등은 식별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 세관 관계자의 설명이다. 엑스레이 검사 직원의 능력에 따라 개장 여부가 결정될 만큼 주관적 판단이 상당부분 가미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결국 이러한 허점을 줄이기 위해서는 여행자 통로를 통해 들어오는 여행객들의 짐에 대한 개장검사율을 늘려야 한다는 것인데, 여행자들의 불편 없이 개장검사율을 늘리기 위해선 인역 증원만이 답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공항만 근무 인력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국가기관 중 유일하게 24시간 2교대 근무를 하고 있는 기관이 관세청이다.
이 같은 문제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관세청은 지난해 공항만 감시분야 등에 126명의 증원을 요청했지만, 국회 심의과정에서 62명만 증원하는 것으로 반 토막 났다. 옆에서 도와주지 않으니 하고 싶어도 못하는 형편인 것이다.
관세청 관계자는 "여행자 불편으로 인해 현재 인력으로는 개장검사율을 높이지 못한다. 지금 속도로 개장검사율을 높이기 위해선 인력 증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세관 직원 없는 구멍 다수"…어디까지 채울 수 있을까
상주직원 통로를 통해 한진 일가가 밀수를 해왔다는 주장도 제보와 보도를 통해 연일 나오고 있다.
특히 관세청이 이미 2년 전 공항의 상주직원 통로를 허술하게 관리한다는 감사원 지적을 받았다는 점에서 '방치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상주직원 통로를 의심하는 이들은 상주직원 통로에 세관 직원이 근무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밀수 통로로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상주직원 통로에는 현재 공항공사 직원들만 근무하고 있다.
관세청 역시 조사 결과에 따라 상주직원 통로를 통한 밀수가 사실로 밝혀질 경우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관세청 관계자는 "상주직원 통로에서 밀수가 발생했다면 여기에 세관 직원을 배치하는 방법도 검토될 수 있다"며 "공항에 3개 이상의 상주직원 통로가 있는데, 24시간 세관 인력을 배치하는 방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같은 논리라면 공항 뿐 아니라 항만에 있는 직원 통로에도 세관 직원을 배치해야 된다는 것이 관세청의 입장이다. 항만 게이트 또한 세관 직원 없이 청원경찰에 의해서만 출입 검사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창고, 공장 등 공항 내 보세구역 일부도 세관 직원 대신 청원경찰이 관리하고 있는데, 이런 곳까지 세관 직원을 투입하려면 결국 이 문제도 인력 증원 문제로 귀결된다는 설명이다.
관세청 관계자는 "공항 상주직원 통로만 세관 직원이 없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세관 직원이 없는 모든 곳에 직원을 배치해 밀수를 감시하게 하려면 인력 증원이 필수인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진 일가가 비행기 수리용품으로 위장해 밀수를 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 역시 개장검사 비율을 높이기 위해선 다수의 인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현장 인력을 지금보다 상대적으로 높이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실시간 통보되는 신용카드 내역…"관세청 적극성 보여야"
◆…지난달부터 해외에서 600달러 이상을 사용하면 관세청에 실시간 통보가 된다. 관세청이 해외신용카드 사용 통보 제도를 적극 활용해 입국 시 관리를 강화해야 된다는 주장이 나오는 상황이다.
일각에선 한진 일가와 같은 밀수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해외신용카드 실시간 통보 제도를 관세청이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올해 4월부터 해외에서 600달러 이상의 물건을 신용카드로 사거나 600달러 이상의 현금을 인출하면 그 내역이 관세청에 실시간으로 통보되는데, 이를 활용해 입국 과정에서 관리를 강화해야 된다는 주장이다.
이전까지는 여행자별 물품구매·인출 금액이 분기별 5000달러 이상이면 여신전문금융업협회로부터 해당 내역이 세관에 통보됐다.
물론 해외에서 600달러 이상의 물건을 신용카드로 사용했다고 해서 모두 밀수품을 들여오는 것은 아니다. 구매 물품을 현지 지인의 선물로 사용하는 등 입국 시 물품을 들고 오지 않을 가능성도 있고 세관에 신고를 성실히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고가의 물건을 신용카드로 구입하거나 고액을 인출한 정황이 있고 입국 시 세관이 이를 적극 활용한다면 밀수를 상당 부분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 관세청은 그동안 한진 일가의 신용카드 사용 내역을 통보 받아 왔다. 그러나 과거 제도에 따라 분기별로 통보를 받다 보니, 입국 시엔 어떠한 제재를 가할 수도 없었다. 지금 와서 집에 있는 물품과 카드 내역을 맞추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작업에 난항을 겪고 있다는 전언이다.
관세청 관계자는 "한진 일가의 카드 사용 내역이 실시간으로 관세청에 통보가 됐고, 이에 따른 관리를 강화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어려움이 덜했을 것"이라며 "해외 비자금이나 현금으로 물건을 사는 경우는 통관행정과는 또 다른 문제고 일단 관세청은 실시간 통보에 따른 관리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밖에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한진 일가와의 유착 의혹도 관세청이 이번 기회에 말끔히 떨치고 가야할 '숙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관세청이 사상 첫 재벌총수 압수수색을 강행하는 등 사건을 주도적으로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관세청의 묵인 없이는 한진 일가의 조직적인 밀수가 불가능 했을 것이라는 의구심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착 의혹에 대해 내부감사에 착수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움직임이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촉발된 관세청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쉽게 사그라지지는 않을 태세다.
관세청은 이번 관세행정 혁신 TF의 '특별대응팀'을 통해 공항 상주직원 통로 등에 대한 감시 방안은 물론, 세관과 항공사 직원 간의 유착 문제 등을 본격적으로 논의할 방침이다.
특별대응팀에서 어떤 권고안을 발표할 지, 관세청 주변의 이목이 모아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