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9월 안에 평양에서 3차 정상회담을 갖기로 남북이 합의했다. 문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다음 달 평양을 방문해 판문점 선언의 이행을 정상 간에 확인하고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함께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으로 가기 위한 담대한 발걸음을 내딛는다고 밝혔다.
4ㆍ27 판문점 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의 가을 평양 답방은 이미 합의된 바 있어 3차 정상회담은 예정된 수순이다. 하지만 당장 다음 달의 회담 날짜를 특정하지 못한 작금의 상황이 예사롭지가 않다.
애초 남북은 경제 협력과 관계 개선을 의제로 8월 말~9월 초 평양 정상회담 개최를 추진해왔다. 북미 비핵화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북한이 우리 측에 정상회담을 논의하자며 고위급회담을 먼저 제의하는 열의까지 보여 이르면 8월 말 일정까지 거론됐었다.
하지만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방북을 앞둔 미국이 “비핵화에 진전이 있어야 남북 관계개선도 가능하다”며 속도 조절을 요구해 정상회담 날짜 확정이 미뤄졌다.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도 9·9절을 앞두고 내달 초 방북을 추진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달 하순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을 시작으로 시진핑 주석의 방북, 문 대통령 평양 방문이 이어지는 '평양의 9월 '은 한반도 비핵평화에 '운명의 달'이다.
미국과 북한은 최근 판문점 실무협의 등 잇단 물밑 접촉을 통해 북한이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해체와 국외 반출 및 폐기 핵무기의 리스트를 제출하고 그 대가로 미국이 북한체제 보장을 위한 '종전(終戰)선언'에 합의해주는 이른바 '비핵화-종전선언 빅딜'을 추진 중이다.
우리 정부는 그동안 가급적 이른 시간에 3차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가능하면 9월 말 유엔총회에 북한 김정은 위원장을 참석시키고 종전선언까지 이어가 보겠다는 목표를 내심 세웠었다.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으로 비핵화 빅딜이 성사되면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종전선언을 추동할 수 있고, 유엔총회 이전에 남·북·미·중 4자가 모여 9월 말 유엔에서 종전을 선언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북미 간 비핵화 진전을 이룬 후 남북이 정상회담을 한다면 남북관계 진전도 그만큼 탄력을 받게 돼 선(先) 비핵화 진전→후(後) 남북관계 개선의 선순환을 기대할 수 있다.
시간상 9월말 종전선언이 힘들 경우 미국 중간선거를 한 달 앞둔 10월 워싱턴에서 추진하는 시나리오도 거론된다. 어느 시나리오든 핵심 전제는 북미협상의 진전이다.
문제는 북·미 협상이 계속 교착될 경우다. 문대통령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이행과 이에 상응하는 미국의 포괄적 조치가 신속하게 추진되길 바란다며 북미 간 비핵화 대화를 촉진하는 주도적인 노력도 함께 해 나가겠다고 천명했다.
하지만 이는 말처럼 쉽지가 않다. 북측은 남측이 미국을 움직여주길 바라고, 미국은 자국 주도의 한미공조의 틀에 한국을 계속 가둬 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한반도 운전자론'을 자처하고 있는 문대통령이 자칫 북미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될 수도 있다.
문 대통령은 한반도 문제는 우리가 주인이라는 인식이 매우 중요하다며 “남북관계 발전은 북미관계 진전의 부수적 효과가 아니라, 오히려 남북관계의 발전이야말로 한반도 비핵화를 촉진시키는 동력”이라고 역설했다. 남북 관계가 북·미 관계의 종속변수인 것처럼 보이지만 남북관계 개선으로 북·미 관계를 움직일 수 있다는 얘기다.
미국눈치 보지 말고 관계진전에 속도를 내라는 북한 입장에서는 반가운 얘기로 들릴 수 있겠지만 '남북관계는 비핵화와 별개일 수 없다'고 말해 온 미국을 자극하는 발언이다.
비록 “완전한 비핵화와 함께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어야 본격적인 경제협력이 이뤄질 수 있다”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철도와 도로 연결 연내 착공 등 남북 경제협력을 강화하겠다”는 문 대통령의 발언에 미국 측이 대놓고 우려를 표명하는 상황이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방북성과가 좋지 않을 경우 9월 안에 열기로 한 남북정상회담을 포함한 남북관계의 앞날이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우려와 곡절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것은 한반도 평화시계가 비록 느리지만 계속 째깍 째깍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강 대 강'의 대치 속에서도 북미 간 물밑 접촉은 계속 이어지고 있고 무엇보다 미 국무장관이 벌써 네 번째나 방북하는 사실에서 속도감이 읽혀진다. 6.12 북미 공동합의문의 합의사항들은 어렵사리 하나 둘 이행에 옮겨지고 있다.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와 동창리 미사일 시험장 해체 작업 등 자발적으로 비핵화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이 직간접적으로 확인되고 있고 미군 유해송환에 이어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고마움을 전하는 친서를 주고받는 등 불과 반년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이어지고 있다.
종전선언은 상호 적대관계를 종식하고 평화적 공존 관계로 나가겠다는 공동의 의지를 표명하는 정치적 선언이다. 남과 북이 10·4 선언에 이어 판문점 선언에서도 종전선언을 추진키로 한 것은 평화체제로 가는 입구를 열고 비핵화를 촉진하기 위한 것이다.
트럼프대통령도 종전선언 논의를 '축복한다'며 한 때 기대감을 부풀렸다가 미국정부가 입장을 바꾸면서 교착상태를 불러왔다. 미국은 종전선언이 사실상 불가침 선언에 해당돼 대북 군사행동 옵션을 스스로 차단하는 데다 유엔군사령부와 주한미군 지위에 미칠 영향 때문에 만족할 만한 비핵화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는 이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종전선언 추진이 비핵화 초점을 흐리게 만든다고 미국 조야는 우려하지만 종전선언을 통해 비핵화를 추동시키는 역발상도 가능하다. 관료들의 반대에도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을 밀어붙인 트럼프대통령이 중간 선거를 앞 둔 가을 유엔총회에서 워싱턴 주류들을 깜짝 놀라게 할 외교정책쇼를 벌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남북미 정상이 세계정상들 앞에서 종전선언을 할 경우 한반도 비핵화평화국면을 세계가 확인해준다는 점에서 북한에게는 '되돌릴 수 없는' 체제안정보장책이 될 수 있다. 시주석의 방북이 협상국면에 악재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비핵화의 촉진자로서 중국을 종전선언에 참여시키는 것이 보다 확실한 담보가 될 수 있다.
미북 화해의 판이 깨지기를 기다리는 대북 적대․강경세력들이 미국 내에 만만찮게 도사려있고, 우리 마음속의 분단의 벽 또한 여전히 높다. 하지만 한반도 평화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리기에는 이미 멀리 와 있다.
김정은을 다시 만날 수도 있다는 트럼프의 메시지가 새삼 주목을 끈다. 남북미중이 외교대회전(大會戰)을 벌일 2018년 9월의 평양, 주류․기득권에 얽매이지 않는 트럼프의 '미치광이전략'이 재앙이 아니라 난마처럼 얽힌 비핵화평화협상의 고르디우스 매듭을 단 칼에 내리치는 축복이 될 지 누가 알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