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이 바뀌었다고 공정과 정의에 대한 개념과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 아닐 텐데 기획재정부가 접대비실명제 폐지를 추진하자 나는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기획재정부는 내가 20년 이상 근무해서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라서 더욱 속상했다. 내가 국세청장 때 도입한 제도라서가 아니라 시대흐름과 국제추세에 거꾸로 가는 정부가 안타까워서였다.
부패와 비리의 원인이 되는 음성적 접대와 로비를 없애 기업 체질을 강화하고 투명한 사회를 만들고자 도입한 제도이고, 선진국들은 이미 우리보다 훨씬 강한 접대비 규제를 하고 있어 국제기준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를 더욱 발전시키지는 못할지언정 폐지한다는 것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또한 접대를 주로 누가 받는가? 정치인, 공무원, 대기업 임원들이다. 나라경제가 어렵고 중산서민들의 가계가 갈수록 어려운 이때 책임감을 느끼고 솔선수범해 허리띠 졸라매고 뛰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 접대받기 편하라고 접대비 실명제 없앤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어려운 여건에서도 혁신차원에서 접대비실명제를 시행하여 접대규모도 줄고 접대문화도 바뀌는 등 나쁜 관행이 전반적으로 축소되었는데, 앞으로 접대비실명제가 정부 방침대로 폐지되면 이러한 악습들이 다시 되살아날 것이 걱정됐다.
당시 내 신분은 국회의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2004년 국세청장으로서 접대비실명제를 시행했던 나는 이후 청와대 혁신관리수석→행정자치부장관→건교부장관을 거쳐 2008년 4월에 치러진 1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야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길은 2가지였다. 접대비실명제 폐지는 잘못된 정책이라는 것을 국민들에게 알려 정부 스스로 결정을 뒤집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투명하고 건전한 사회를 물려주기 위해 꼭 필요한 제도이니 국민들이 이 소중한 제도를 지켜주도록 호소하는 방법이었다. 두 번째는 국회가 입법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국회에서 접대비실명제를 부활하는 법률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길이었다.
<대국민 홍보 강화>
우선 기획재정부가 대통령에게 접대비실명제 폐지를 보고(2008.12.18)한 내용이 보도되자 나는 바로 12월 21일 '또 다시 접대공화국으로 회귀하자는 것인가?'라는 보도자료 배포를 시작으로 정부정책의 문제점을 낱낱이 지적하면서 폐지 방침을 즉각 철회할 것을 촉구했다. 사실상은 국민에게 호소한 것이었다.
① 접대비실명제는 기업의 영업활동이나 자율성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고 원칙을 세워 우리도 선진국처럼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높여 기업체질을 강화하자는 것이다. 원칙 밖에 있던 비정상적 관행을 정상으로 바로 잡은 것이다.
기업은 접대 금액이 50만원 이상인 경우에도 자율적 판단에 따라 지출할 수 있다. 다만 업무 관련성을 입증하지 못하는 경우 세법상 비용으로만 인정되지만 않을 뿐 기업의 접대비 지출 자체를 규제하는 것이 아니다.
사업과 관련된 지출만 비용으로 인정하는 것은 국제적으로 엄격하게 적용되는 회계학과 세법의 기본원칙이다(비용수익 대응의 원칙). 삼계탕집에서 쇠고기를 원료로 사용했다고 신고하는 경우 비용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런 취지에서 보면 50만원 미만의 접대비도 실명제를 실시해야 하나 업계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비교적 고액접대만 대상으로 한 것이다.
② 접대비는 술 먹고 밥 먹고 선물사주고 골프 치는데 쓰이는 돈인데 개인목적으로 쓰이는 이런 접대비까지 국민세금으로 지원해줄 수는 없지 않는가? 접대비 '1억원'을 세법상 비용으로 인정해준다는 의미는 이 중 27만 5천원(법인세 25%+주민세 2.5%)은 정부예산에서 부담하고 기업은 나머지 72만 5천원만 부담하는 것을 의미한다.
③ 업무와 관련 없는 접대비를 비용으로 인정하지 않는 국제기준(global standard)을 따른 것이다. 일본과 영국은 접대비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미국은 80달러 이상 접대하면 접대상대방과 접대목적 등을 입증해야 한다. EU 각국도 접대비에 대해 우리보다 훨씬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
④ 세계 각국이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대책을 강구하고 있지만 접대비를 늘려 소비를 부추기려는 국가는 한국 정부를 제외하고는 없다. 원칙과 정도를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기업경영 투명성 과 기업체질 강화라고 하는 시대 흐름과 국제추세에 역행하기 때문이다. 고액향략성 접대받기가 불편하다고 경제위기를 맞아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할 기업들에게 접대를 권장하는 한심한 정책이다.
⑤ 회사돈을 개인접대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부패이고 과도한 접대를 받는 것은 뇌물인데 이를 정부가 조장하는 것은 투명하고 건강한 사회를 포기하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검찰 등 사정기관이 청탁성 접대나 로비를 수사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이를 촉진하는 모순된 정책을 쓰고 있다.
방탕한 접대문화와 잘못된 유흥문화는 비리부패, 가정파괴, 청소년문제 야기 등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해왔다. 우리기업들이 글로벌경쟁에서 이겨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술과 상품개발에 투자하고 투명성을 높여야 하는데 정부가 음성적 접대나 청탁을 부추겨 기업의 체질을 약화시키고 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정부인가?
⑥ 접대공화국으로는 기업 및 국가경쟁력을 높일 수 없다. 글로벌 경쟁시대에는 접대경쟁이 아닌 새로운 기술, 새로운 상품, 새로운 시장 개발 등을 위한 투자확대와 투명성 제고를 통해 경쟁력을 올려야 한다. 과거 IMF 외환위기 때 신기술이나 윤리경영을 실천했던 혁신적 기업들은 중소기업이라도 살아남았지만, 분식회계로 이익을 부풀려 접대나 청탁에 의존하던 기업들은 다 도산했다.
⑦ 불건전한 접대를 통해 경기를 살리려는 것은 체중을 줄이기 위해 줄담배를 피우라는 것처럼 매우 위험한 처방이다. 소비는 가계에 의해 주도되고 기업은 투자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기술개발하고 투자하는 데 돈을 써야 하는 기업에게 소비를 늘리기 위해 음성적 접대를 부추기는 것은 기업도 국민경제도 모두 병들게 하는 단견이다. 기업이 접대비실명제를 거부하는 것은 허약한 사람에게 보약을 주니까 써서 먹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격이다. 말로만 윤리경영 외치지 말고 행동과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⑧ 정부는 소액분할 결제와 같은 변칙운용을 내세우면서 접대비 실명제를 폐지한다고 발표했는데 이는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격'이다. 분할결재 등은 오랜 관행이 정상궤도로 바뀌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가피한 현상으로서 제도가 정착되어 가면서 크게 줄어들고 있다. 또한 접대비 신용카드 사용내역이 국세청 전산망을 통해 시간대별 사용자별 업소별로 파악되므로 편법 접대비 사용은 정부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단속이 가능하다.
<접대비실명제 부활을 위한 법인세법개정안 발의>
접대비실명제 폐지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정부는 야당 국회의원의 호소나 국민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오직 단기적인 경제 활성화에만 꽂혀 있었다. 결국 정부는 2009년 1월 28일 법인세법시행령 제42조의 2(접대비관련 지출 증빙 등)를 삭제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이제 국회의원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법으로 의무화하는 길밖에 없었다.
따라서 나는 폐지된 접대비실명제를 법인세법에 규정하여 의무화하기 위해 2009년 7월31일 법인세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16명의원발의)했다. 개정안은 법인세법 제25조에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건당 일정금액 이상의 접대비는 접대 상대방 등 업무관련성을 입증하는 지출증빙을 기록·보관"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내가 속해 있는 민주당이 소수야당이라서 국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정부여당을 설득시키지 않으면 통과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2009년 12월 11일(금) 열린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이재오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과 김황식 감사원장 등에게 접대비실명제 폐지의 문제점과 재시행에 대한 질의를 했다. 이재오 위원장은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했고 김황식원장은 내 의견이 옳다고 답변하였다.
이는 지난 12월11일 국회 예결특위에서 "(접대비 실명제 재도입을) 심각히 검토하고 있다는 이재오위원장의 발언이후 기획재정부장관이 14일 국회 예결특위에서 "폐지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부활시키는 것은 정책의 일관성과 신뢰도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반대 의사를 밝힌 데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재차 강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접대비실명제는 부활되지 못했다. 접대비실명제 부활이 필요하다는 정부 내 이러한 인식이나 입장들은 경제활성화를 위해 폐지해야 된다는 기획재정부의 반대로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또 야당의 수적 열세에 따라 내가 대표발의한 법인세법 개정안도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다음 회에서는 접대비실명제가 법령에서 폐지됐음에도 과거로 후퇴하지 않은 접대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